자유와 저항의 문화대통령한국을 빛낸 대중예술인

[추억의 LP 여행]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 下
자유와 저항의 문화대통령
한국을 빛낸 대중예술인


1994년 1월, 3집 준비를 위해 또 다시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7개월 후 발표한 3집은 음악 혁명이었다. 헤비메탈 사운드로 중무장해 통일 문제과 획일적 교육에 대한 비판을 담은‘교실 이데아’등 사회성 강한 노래들이 수록된 3집은 최고의 음반으로 평가 받는다. 대신 흥행은 주춤했다. 하지만 타이틀곡‘발해를 꿈꾸며’는 악마주의 논쟁을 불러왔다.

노래를 반대로 돌리면‘사탄을 사랑해요’라는 말이 들린다는 이유였다. 더욱이 악마 개그까지 유행되는 등 부작용이 심해지자 TV에서는 진위 여부를 가리는 실험을 벌이기도 했다. 서태지 본인은‘음해성 루머’라고 반박했다. 94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94 팍스 뮤지카’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며 음반도 발매했다. 10월, 팬 클럽 회원이 1만2,000명이 넘어서 관리가 힘들어진 기획사 아이비가 팬클럽 공식 해체를 선언하자, 지역ㆍ학교별로 나뉘는 별도의 팬클럽 체제로 전환되었다.

95년 1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3 집앨범 내용과 의미를 심도깊게 다루며 서태지와 아이들을 한국식 록 음악 대표로 소개했다. 4집 발표를 앞 두고는 팀 해체설이 나돌았지만, 9월에 자체 기획사 ‘요요 기획’사무실을 마련하고 10월에 4집‘컴백홈’을 발표했다. 4집은 미국에서도 논란의 대상이었던 갱스터 랩 음반이었다. 발매전부터 사전 검열 공방을 몰고 온 이 음반은 선주문 예약만 100만장이 넘어서는 신기원을 기록했다. 음악적 진보는 없었지만 양현석과 이주노가 기타와 드럼을 연주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하지만 PC통신망을 통해 다시 사탄론이 고개를 들고 수록곡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가 KBS로부터 방송금지 조치를 당하고‘시대 유감’‘필승’ 등이 가사 수정 요구를 받으며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고발까지 당했다. 판금조치설에 미국 갱스터랩 그룹 사이프레스 힐 음악의 표절설까지 불거져 나오자, 서태지는 이에 대한 반발로 ‘시대 유감’의 가사를 스스로 삭제하고 잠적해 버렸다. 하지만 10대들은 자유와 저항의 투사로 서태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잠적 후‘대형 교통 사고로 중태’ 혹은 ‘폭력 조직 개입’ 등 온갖 소문에 휩쌓였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한동안 언론과 숨박꼭질을 벌이다, 96년 1월 성균관 유림회관에서 전격적으로 팀 해체와 은퇴를 동시에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의 연희동집은 청소년팬들로 매일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상실감으로 인한 ‘서태지 자살조’가 행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헛소문이 보도되면서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하지만 교수, 기자 등까지 포함된 요요, 포트,도래네, 투스탭 등 주요 팬 클럽들이 주축이 된 서태지 기념사업회가 공식 출범하으로써 안정을 찾아 갔다.

은퇴 이후인 96년 2월 베스트앨범 ‘굿바이’와 영상집 발매에 이어 4월엔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자취를 담은 뮤직비디오 ‘THE&' , 6월엔 삭제한 가사를 복원한 싱글‘시대 유감’등이 연이어 발매되었다. 이에 미국 대중 음악 전문지 빌보드지는 신중현을 커버로 ‘서울의 음악, 신세대 음악이 한국을 달구고 있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분석 기사를 이례적으로 내 보냈다.

또한 96년 ‘서태지와 꽃다지’, ‘서태지와 아이들을 듣는다’, 99년‘서태지’, ‘태지 주노 양군과 함께 한 1036일’, 2001년‘서태지 담론’등 수많은 연구 서적과 게임까지 계속해 쏟아져 나왔다. 97년 1월, 팬들이 주도한 은퇴 1주년 기념식엔 서태지의 불참에도 불구, 5,000여명의 팬들이 운집했다. 그들에게 서태지는 이미 ‘문화 대통령’이었다.

96년 3월 KBS2 라디오 DJ로 거듭난 이주노는 혼성 댄스 그룹 영턱스의 음반 제작자가 되었다. 양현석도 킵식스의 음반 제작자가 되었다. 서태지는 97년 4월 앨범 2장 발매에 60억이 거론되며 솔로 컴백설이 불거져 나왔다. 98년 7월 7일 컴백앨범인‘서태지’ 발매와 함께 양현석도 10월에 힙합 앨범‘악마의 연기’로 솔로 데뷔를 했다.

은퇴후 4년 7개월 후인 2000년 8월 29월, 미국 운둔생활을 청산한 서태지가 귀국했다. 하드록 신보‘울트라맨이야’는 10-20대의‘과연 서태지’란 평가와‘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라는 새대별로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2만5천여명이 운집했던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의‘컴백공연’에 이어 10월 잠실주경기장의 평화콘서트에도 참가하며 2001년 10월에는 DVD가 발매되었다.

2002년 3월 교학사의 고교 ‘음악과 생활’교과서 대중가요단원에 서태지의‘발해를 꿈꾸며’가 90년대의 대표곡으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해냈다. 서태지는 음반사 예당과 제휴계약을 맺은 후 2004년 1월, 7집‘로보트’가 발표되었다. 이 음반은 극심한 불황에도 불구, 40여만장이 판매되며 2004년 판매 1위앨범에 등극했다.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서태지는 5월에는 첫 해외공연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한-러시아 수교 120주년 기념공연을 4년만에 SBS TV‘생방송 인기가요’와 최수종쇼에 출연해 관심을 모았다.

현재 기획사‘괴수인디진’을 설립해 음악활동외에도 록그룹 넬등을 발굴하는 제작자로도 활동을 하고 있다. 양현석은 인기가수 세븐, 원타임, 지누션을 거느린 연예기획사 YG엔터테인먼트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고 댄스비디오로 성공을 거두었던 이주노는 방송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슈퍼스타 서태지는 2005년 1월 KBS에서 성인2000명에게 물은 조사에서 조용필, 배용준과 더불어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문화인 5위에 랭크되었고 문화일보에서 발표한‘광복이후 대한민국을 가장 빛낸 인물’ 60명에도 당당히 선정되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1-19 17:36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