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서 잔뼈굵은 '악마들' 쇼무대 스타로 발돋움

[추억의 LP 여행] 록그룹<데블스> 上
기지촌서 잔뼈굵은 '악마들' 쇼무대 스타로 발돋움

6인조 소울 록 그룹 데블스. 대표 곡인 ‘그리운 건 너’와 ‘너만 알고 있어’, ‘몰라요 몰라’는 언제 들어도 편안하고 흥겨운 숨겨진 한국 소울 록의 명곡이다. 1969년부터 브라스가 가미된 사운드를 최초로 시작했던 이들은 말쑥한 양복 차림보다는 태권도복이나 망토, 잠옷 같은 무대 복장에 맨발 차림도 불사했던 튀는 그룹이었다. 하지만 데블스의 진가는 엽기적이었던 기발한 쇼맨십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소울 풍의 탄탄한 창작곡을 수록한 독집 앨범을 석장이나 발표한 진짜 밴드였던 것이다. 데블스는 한국 록의 3대 계보로 통하는 신중현, 김홍탁, 최이철과는 상관없는 자생적 그룹이었다. 이들은 전국 각지의 기지촌을 주무대로 잔뼈가 굵은 질긴 생명력의 아웃사이더였다.

리더 김명길은 대한제분의 총 책임자였던 부친 김익성씨와 모친 유순분 씨의 3남 1녀 중 둘째로 1947년 6월 26일 인천시 하수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선주였던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해방 당시 좌우익 갈등에 휘말린 부친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성장했다.

부친은 할아버지의 반대로 가수의 꿈을 접었던 분. 명랑한 성격의 김명길은 인천 송현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등교길에 행진곡을 들으며 흥얼거리길 좋아했다. 집안 어른들을 통해 들은 김용만의 ‘방랑시인 김삿갓’을 처음 부른 이후 6학년 때 닐 세다카의 ‘Oh! Carol’같은 팝송을 접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at다 부른 노래는 식사 시간에 마음 속으로 끝까지 불러야 밥을 먹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 했다.”

동인천중에 입학하자 사춘기가 된 그는 염세적으로 변해 갔다. 이 때 접한 클리프 리처드 주연의 음악 영화 ‘틴에이저 스토리’의 삽입곡들은 음악적 감성을 자극했다. 이후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를 하던 형을 통해 엘비스 프레슬리등 많은 외국 노래를 접했다. 당시 음악 실기 시간에 어려운 노래를 끝까지 부르는 학생은 그가 유일했다. 이에 음악 선생님이 “방과후에 노래 공부를 하자”고 했지만 도망을 다녔던 그 시절에 대해 아쉬움을 지니고 있다.

인천공고 기계과에 진학해 경기도 대표 아마추어 레스링 선수로 활약했다. 1966년 고교 졸업 후 신검을 받고, 67년에 입대 영장을 받았다. 당시는 맹호, 청룡부대 등 전투 부대가 월남전에 투입되기 시작했던 시기. 지원자가 없자, 신검에서 갑종 판정을 받은 사람은 무조건 해병 청룡부대로 차출되었다. 월남으로 갈 처지가 되자, 김명길은 음악을 하기 위해 잠적해 버렸다. 병역 기피자가 되었던 것. 신분을 숨겨야 했던 그는 67년 그룹 앰비션을 결성해 인천의 기지촌인 신포동의 미군 클럽 '캘리포니아‘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멤버는 기타 이홍섭, 베이스 최진화. 인척들의 간섭이 없는 파주 용주골 등지로 활동무대를 옮겼지만 음악 장비를 도둑맞아 인천으로 돌아왔다. 밴드를 시작하며 영향을 받은 음악은 제임스 브라운등 흑인 음악. “그 때 우리는 비틀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흑인 음악을 더 좋아했죠. 그래서 우리 레퍼토리는 거의 '새까만' 곡이었죠.” 당시 기지촌을 통해 입수한 외국 빽판들을 야외 전축으로 들으며 음악을 익혔다. “당시 얼마나 판을 많이 들었던지 까만 판이 하얗게 변했을 정도였다.”

1968년 6월. 파주 파라다이스 클럽에서 연주하던 베이스 최성근이 합류하면서 드럼 정태섭, 세컨드 기타 박인규와 4인조 밴드를 결성했다. 서로 잘났다고 말하는 세상에 대한 반항을 담은 악마들이란 뜻의 ‘데블스’로 이름을 정하고 다시 파주로 갔다. 하지만 매니저 역할을 하던 박영걸이 잠적하면서 기지촌 주변 밴드들이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이에 팀을 떠나려다가 양공주판이었던 살벌한 왜관의 미군 클럽 실버 달러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젊은 치기탓이었다. 이웃에 있던 클럽 킹에는 김민배, 연석원, 도한길의 록그룹 에인절스가 출연하고 있었다. 연석원은 동향인 인천 출신이었다. 당시 부산 하야리에서 미8군 오디션을 받은 데블스는 그러나 A클라스로 합격해 전북 김제의 미군 클럽 하우스 밴드로 부킹이 되었다.

그 때 에인절스가 데블스 후임으로 실버 달러로 왔다. 이 인연으로 두 팀은 통합을 해 6인조로 재구성되었다. 곧 베이스 최성근은 테너섹소폰으로 전향해 브라스 밴드를 구성했다. 다시 파주로 올라와 활동하던 중 조성국의 도움으로 종로 2가 관수동의 음악 살롱 라틴 쿼터로 진출했다. 라이더스, 챠밍 가이스, 팝 콘스, 스핑크스, 셰그린 등 여러 록 그룹이 출연을 했던 명소였다.

주인은 에드훠의 보컬로 명성을 날렸던 서정길씨. 노래에 따라 서로 스텝?맞추는 독특한 무대 매너를 선보인 데블스에 반한 서정길은 장기 계약을 요청했다. 하지만 밤에는 파주에서 낮에는 서울에서 연주하는 강행군이 지속되자 파주 클럽에만 전념했다.

라틴 쿼터에서 철수한 후 서정길의 주선으로 시민회관 ‘AAA쇼’무대에 처음 섰다. 이 때가 1969년 말. 맨 처음 데블스는 쇼의 진행이 잘못되거나 출연자의 펑크 때 대타용으로 무대에 섰지만, 이들의 연주에 반한 박영호 단장이 정식 계약을 체결해 주었다. 당시 AAA쇼의 출연 가수들은 신중현, 펄 시스터스, 김추자, 쟈니 리, 정원, 이태신 등 당대의 스타들. 후에는 나훈아까지 합류했다. 지금은 트로트의 황제이지만, 당시 나훈아는 멤버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노래 반주를 부탁하던 무명 가수였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1-26 10:47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