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 대중화의 기수 뭇 소녀의 꿈에 들다

[추억의 LP 여행] 윤형주 上
포크 대중화의 기수 뭇 소녀의 꿈에 들다

1970년대에 포크를 향유했던 중장년층은 윤형주를 비롯해 한대수, 송창식, 양희은, 김세환, 이장희, 김민기, 사월과 오월, 이연실, 서유석, 김정호 등 포크 뮤지션들이 일으킨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문화에 대한 원초적인 향수를 지니고 있다. 윤형주는 그 중심에 있었던 주역이었다.

귀공자풍의 앳된 외모와 발랄한 노래로 큰 사랑을 받았던 그는 1967년 2월 송창식, 이익근 등과 세시봉 트리오를 결성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68년 송창식과 함께 결성했던 듀오 트윈 폴리오는 포크의 대중화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대표 곡 ‘조개 껍질 묶어’, ‘두 개의 작은 별’,‘비의 나그네’,‘어제 내린 비’등은 지금도 애창되는 히트 넘버. 그의 음악은 시대와 대상을 초월해 언제나 부담없이 노래하고 들을 수 있는 편안함으로 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윤형주는 서울고 국어 교사와 경희대 산업대학장을 역임한 부친 윤영춘 씨와 원산의 신학교 시절 빼어난 소프라노이면서 피아노 반주자였던 모친 김귀순 씨의 장남으로 1947년 11월 19일 서울 신문로의 전 서울고 관사에서 태어났다. ‘별 헤는 밤’으로 유명한 고 윤동주 시인은 6촌 형제 간이다. 네 살때 한국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성악을 했던 어머니의 영향은 컸다. 늘 집에서 음악을 들고 자란 그는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어릴 적 별명은 앵무새. 전쟁이 끝난 54년 서울 덕수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노래를 잘 했지만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라디오 음악 프로‘누가 누가 잘하나’에 참가했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떨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입상을 하지는 못 했다. 60년 대광중학에 입학하면서 AFKN을 통해 팝송을 처음 접했다. 그는 방과 후에는 아예 라디오를 끼고 다녔던 팝 송 마니아였다. 당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수는 지미 로저스와 마티 로빈스.

학업 성적이 출중했던 그는 63년 명문 경기고에 진학하면서 동대문 동신교회의 성가대원이 되었다. 당시 고 3이었던 성가대 선배 조영남과 이 때 두터운 음악 인연을 맺었다. 66년 연세대 의대에 합격하자 어머니가 기타를 선물로 건네주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학업보다는 음악에 몰두했다. “아버지가 전해 준 6촌형 시인 윤동주의 시에 감동 받아 시를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연세대 최초의 록 그룹 ‘피닉스’를 결성해 TBC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 나갔지요. 저는 베이스 기타를 맡았습니다.”

당시는 밥 딜런, 존 바에즈, 주디 콜린스 등 미국 포크 음악이 엘리트 음악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 그 해 가을 슈퍼 스타급 포크 트리오 킹스톤 트리오를 모델로 같은 연대생 이장희, 유종국과 함께 포크 트리오 라이너스를 결성했다. 대학가와 다운타운가에 노래꾼으로 알려지면서 2학년 때 젊은이의 전당이었던 세시봉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서울예고 출신 송창식을 만났다.

송창식이 트리오 결성을 제안해 왔지만 오페라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기타로 노래할 뿐 포크의 기본 곡도 모른 상태인지라 처음엔 거절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음악적 감성을 발견하곤 67년 11월 송창식과 연대 토목과 동급생 이익근과 함께 트리오를 결성했다. 이름은 업소의 이름을 빌여 ‘세시봉 트리오’로 정했다. 하지만 68년 2월, 이익근의 군입대로 포크 듀오 트윈폴리오로 개편되었다. 이후 몇몇 방송에서 통기타 반주로 정훈희의 ‘안개’등을 불렀다.

신선한 포크 스타일의 노래를 구사했던 이들은 ‘한국의 사이먼과 가펑클’로 불리며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데뷔 앨범은 펄시스터즈, 박연숙과 함께한 김인배 작편곡집으로 68년 발매. 상큼한 화음의 ‘하얀 손수건’ 등 6곡의 번안곡은 재판이 발매될 정도로 젊은 층에 큰 인기를 모았다. 또한 신중현이 음악 감독을 맡은 김응천감독의 하이틴영화 ‘푸른 교실’에 조영남, 최영희 등과 함께 출연했다. 그 해 12월 드라마센터에서 첫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대중속으로 파고들었다. 포크의 대중화가 시작된 셈이다.

이들은 경기여고 특활반의 초청을 받고 당시 여고 2학년이었던 양희은의 노래 반주를 해 주는 등 청소년들 속으로 파고 들었다. 69년 12월,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트윈폴리오는 느닷없이 해체를 발표했다. 완고한 교육자 집안의 반대 속에 어렵게 음악 활동을 했던 윤형주가 학업 때문에 경희대 의대 본과로 학교를 옮기는 사태가 발생되었기 때문. 이에 69년 12월21~22일 이틀 동안 드라마센터에서 공식 고별 공연을 개최했다.

공연은 찬조 출연 없이 둘 만이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2시간 동안 진행퓸駭? 수 많은 10대 소녀 팬들에 의해 울음 바다가 되었던 이날 공연 이후 계속된 팬들의 요청으로 무려 6번씩이나 비공식 고별 공연을 열어야 했다. MBC, TBC 등 방송들도 이례적으로 5차례나 고별 공연을 재편집 방송하여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고별 공연 직후 12곡이 수록된 독집 <튄폴리오 리사이틀-지구.70년1월>이 발표되었다. 이 음반 역시 76년과 80년 두 번에 걸쳐 재발매되었을 만큼 포크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해체 6개월후인 70년 6월 29일, 젊은이의 전당으로 탄생한 명동 YWCA 청개구리 개관 행사에 윤형주, 송창식은 김민기, 양희은 등과 나란히 참석했다. 주위의 요청에 못 이겨 1~2곡을 부르기로 하고 즉석에서 ‘하얀 손수건’ 등 히트곡을 불렀다. 그러나 거듭되는 앵콜 요청으로 동요메들리, 찬송가, 트로트 ‘눈물을 감추고’ 등 장르를 파괴하는 레퍼토리를 1시간도 넘게 불러야 했을 만큼 이들의 인기는 여전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2-17 14:03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