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에서 심연을 보는 일을 그만두고,ㅓㅇ느 순간 자신의 본질을 향해 훌쩍 뛰어내린다면자기정체성을 찾기 위해 모험 속으로 뛰어드는 무모하지만 강렬한 열정

[문학과 페미니즘] 전경린의 <염소를 모는 여자>
벼랑에서 심연을 보는 일을 그만두고,
ㅓㅇ느 순간 자신의 본질을 향해 훌쩍 뛰어내린다면
자기정체성을 찾기 위해 모험 속으로 뛰어드는 무모하지만 강렬한 열정


1995년 등단하여 1996년에는 한국일보문학상, 1997년에는 문학동네소설상, 1999년에는 21세기문학상을 수상하며 꾸준히 수작들을 발표해온 작가 전경린에게는 ‘귀기와 정념의 작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그 수식어만큼이나 전경린의 소설은 강렬하고 색다르다. 그것은 매우 여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성에 숨겨진 야성적 본능과 정열을 여성성의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무의미한 일상을 살아가는 전경린의 여성들은 다른 삶을 향해 진지하게 고뇌하고 치열하게 열망한다. 그들은 강한 자의식이라는 필연적으로 고통받거나 분열될 수밖에 없는 자질을 지녔고 여러 운명적 불행과 고난을 만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굴하지 않는다.

어느 벼랑이나 심연의 끝에서 너무나 야성적이고 극한적으로 새로운 삶을 선택하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들의 삶과 사랑은 언제나 불온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씩씩하고 거세다. 여성이기에 오히려 강렬한 실존적 욕망을 전경린은 매우 여성적으로, 아니 ‘여성’이라는 야성으로 그려낸다. 그리하여 문체와 내용 모두에 섬뜩한 파격의 미학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낯설지만 탄탄하고, 그래서 더욱 매혹적이다.

중편 ‘염소를 모는 여자’는 그녀에게 한국일보문학상을 쥐어 준 소설일 뿐 아니라, 특히 전경린 특유의 장기가 잘 발휘된 초기 소설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다.

“난 나 이외의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아. 그저 나인 채로 끝까지 가보고 싶어”
“한때는 좀 더 찬란한 무엇이 되어 시간보다도 더 빨리 가리라, 꿈꾼 적도 있었”지만, 나의 일상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진부함으로만 메워져 있다. 남편과 나 사이에 “남은 진실은 강박관념과 같은 사소한 취미와 습관들뿐이”고, “우리에게 결혼의 신성한 봉인은 찢겨버”린지 오래이며, 우리는 “나날이 더욱 우아해지는 한 쌍의 권태와 냉담”만을 피워낼 뿐이다. 남편의 여자에 대해서 “나는 명백하게 캐내지도 못했고 용서하지도 못했”으면서도, “그 여자에 대해 꿈을 꾼다.”

“감방에 들어가 책만 읽는 것”이 꿈이라는 남편은 “아무 것도 진지하게 할 수가 없어서 잠도 자지 않고 비디오를 보고”, 나는 “순수한 취미”로 정보지의 주택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어 의미도 없이 그 집의 주위 환경을 물어보곤 한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 그 어딘가에 있는 비어있는 집들의 문을 두드리는” 행위만이 유일한 나의 오락이자 유희다.

그러나 내가 꿈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다. 나는 시골의 휴게소에서 웨이트리스가 되어 그곳을 “생의 중립국이며 완충지대”로 여기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의무도 지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감시받거나 검토당하지 않는 인생”에 대한 꿈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나는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싶다”를 수시로 외치고, “오히려 이 반복을 삶의 배경으로 밀어낼 수 있는 자기 속의 격정을 발휘해보라고, 반복을 잊을 수 있는 세상의 숨겨진 보석 한 가지씩을 발견해내”야 한다고, “난 나 이외의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아. 그저 나인 채로 끝까지 가보고 싶어”라고 토로한다. 물론 내 진부한 일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지만 말이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긴 길 앞에서 두 눈을 감고, 두 귀도 닫고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훌쩍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오고, 상대편의 남자는 새어머니의 영혼이 들어있는 염소 한 마리를 맡아달라고 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자아주의자와 영혼의 성소인 염소”가 만난다. “탑 꼭대기의 밤처럼 고요하고 먹처럼 검은 염소”, 아파트 안에서도 “야생의 위엄을 갖춘 모습”을 보여주는 염소를 바라보며, 나는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없는 것으로 직조된 이 삶을 다 아는 듯 고요하고 순수할 수 있다면 그것도 푸른 심연의 경지일 것이다”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나는 아파트 정원에 매어놓은 염소를 돌보아 주는 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를 통해 본 것은 내 속에 있는 염소. “나의 정체를 꿰뚫어보”는 그는, “우리 집 창문으로 당신이 보이지요. 나는 당신을 자주 보았어요. 당신은 그냥 살지요. 집에서는 멍하니 앉아 있고요. (…) 당신 염소처럼 당신은 절망해 있어요. 왜 당신은 자신을 한없이 이완시킨 채 시간을 흘려 보내고만 있나요?”라고 말을 건넨다. 인식하지 못?나를 일깨워주는 청년에 대해 “마치 나 자신이 한밤중에 울었던 그 염소인 것처럼, 나 자신이 한밤중에 그에게 의지했던 바로 그 염소인 것처럼, 슬픈 추억이 가득한 친숙함이 몰려”온다.

“우산 없이는 이 세상을” “혼돈스럽고 불안하고 (…) 두려워” 살 수 없다고 말하며, 항상 검은 박쥐우산을 들고 다니는 청년은 “나는 내 숲(우산)을 들고 다니죠. 내 숲 아래를 지나는 것들하고만 나는 교류해요”라고 말하는데, 그에게 우산은 “세상의 신랄함을, 세상의 혼돈과 폭력성을, 불안과 그 무의미한 경직성”을 가리는 도구와도 같다. 마치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런 사유들을 거치면서 나는 “나 자신까지도 남편과 공모해 나를 방치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염소는 자신이 단지 염소일 뿐이라는 그 태연한 사실을 통해 닫힌 우물처럼 내 몸속에 묻혀 있던 또 하나의 염소의 얼굴을 비추어주”게 된다.

무수히 반복되는 일상의 어느 날 나는 돌연히 집을 나온다. 정신병원에 실려가는 청년을 보고, 그의 집에서 밖으로 던져진 검은 우산을 주워서는, 나의 가정을 “이미 오래 전에 훼손된 집”이라 명명하고는, 염소를 몰고 아파트를 벗어난다. “미망과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혼돈과 망상 따위로 눈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그렇지만 벼랑 끝에 붙어 있는 것들은 언제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진정하기도 어렵고 자족하기도 어렵고 순수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언제까지 벼랑 끝에 배를 붙이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현재의 내 생을 떠난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긴 길 앞에서 두 눈을 감고, 두 귀도 닫고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훌쩍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심연 속에 현실보! 다, 현실의 현실보다도 더 강한 구름의 다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자신의 숲을 향해 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구름의 다리”를 향해 가는 것이다.

나는 염소를 모는 여자가 되어, 마치 나와 동격인 염소를 몰고 다른 생을 향해 걸어간다. 바람이 세차고 비가 내리지만, “모든 떠다니는 것들(“산을 넘는 나비, 강을 건너는 갓털 씨앗들, 대양을 횡단하는 새떼, 삶의 지붕 위에 떠오르는 영혼들”)이 그렇듯이” 염소도 나도 젖는 것이 두렵지만, 검은 박쥐 우산을 숲으로 삼고 길을 나선다. 내 앞에 또 다른 생, 그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나를 향해 걸어가는, 오직 나에게로 향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절대적으로 긍정적이다.

내용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형식적인 면의 여성성 또한 이 소설의 강렬한 매력이다. 소설의 서사는 논리를 거부하고 은유와 환유를 넘나든다. 삽화가 나열되는가 하면, 환유적으로 움직이는 시선에 따라 포착되는, 결코 그 사이 논리성을 부여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소설 속에 펼쳐진다. 현실에 대한 사유와 상상의 연결고리들도, 그저 철저히 논리를 거부하고 여성적 시선과 인지점을 따라 그려진다.

전경린은 여성을 다룬 소설이, 혹은 소설 속의 여성이, 혹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가장 여성적이면서도 가장 강렬하게 생을 불태우는 순간들을 포착해 한 편의 소설을 직조해내었다. 여성 자신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숨겨진 “여성성”을 그녀는 치열하게 탐색한다. 그리하여 어쩌면 가장 여성적인 방법으로, 그러나 매우 낯설게, 여성에 대해 탐구하고 그것을 가장 강렬한 여성적 언어로 펼쳐낸다. 그런 면에서 그가 한국문학에서 페미니즘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만큼은 분명하다.

여성성에 사로잡히거나 편향되어 힘들다고 말하는 당신, 혹은 여성성을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애마저 쓰고 있는 당신이라면, 전경린을 한 번 읽어보자. 당신은 가슴 뿌듯하게 여성이고, 그래서 당연하게도 이처럼 강렬하고 치열할 수도 있을 터이니 말이다

어느 날 나에게 찾아와 내 속의 진정한 나를 일깨워준 염소. 순해 보이는 외양에 “야생의 기미”를 숨기고 있는 염소는 야성의 본성으로 가고자 하는 나와 결국은 동격이다. 소설에서 염소는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흑단 같이 검은 그 짐승의 이미지는 바깥을 염탐하지 않는, 자기 내부에 틀어박힌 자의 침묵과 존재와 일체가 되어버린 슬픔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의미를 헛헛하게 뛰어넘는 가벼움. (…) 불볕이 몸을 뚫어 금새라도 화륵 타오를 것 같은 야릇한 평화를 거느리고. (…) 그렇게 어두운 하늘 아래 고요히 묶여 있을 줄 아는 염소는 세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예감이 들곤 했었다.”

“염소는 철저히 다른 언어로 고집을 부렸다. 염소가 그리워하는 것은 숲속의 염소 무리뿐이었다. (…) 그의 몸 속에는 숲속에 묻혀있는 칡뿌리와 나무 등걸들과 푸른 풀밭을 향한 그리움이 갇혀 있었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2-24 13:34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