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기의 골프이야기] 마스터스에 대한 감회


DJ가 썼다는 ‘옥중서한’을 읽고 나서 외국어 실력에 대한 그의 경고 메시지에 대해 절실하게 공감했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외국어 실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이 점은 여태껏 살아오는 동안 해야 한다고 느꼈으면서도 해내지 못한 아마도 유일한 분야일 것이다.

그 때 영향으로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인 1994년 4월 아들을 미국에 보냈다. 주변에서 흔히 말하던 영재교육을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아들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무엇에 종사하든 영어는 구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학비자는 받지 않았다.

그 전에 몇 차례 미국 여행을 하는 동안, 관광비자라도 6개월 체류기간을 주는 관행과 미국 정부에서는 불법체류자일지라도 아이들에게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네 학기를 그곳에서 보낸 아들은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정식으로 유학을 오겠다고 말한 뒤 자진 귀국, 초등학교 6학년에 복귀한 이래 대학에 진학했고 지금은 병역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중이다.

아들을 미국에 보내던 바로 그 날이었다. 아들과 함께 뉴욕으로 가서 하룻밤을 같이 지낸 후 혼자서 애틀란타행 비행기를 탔다. 애틀란타공항에 도착해 공항 주변에서 렌트카를 빌려 20번 도로를 따라 서너 시간 달린 끝에 오거스타에 도착했다. 지금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곳에 도착한 때가 월요일 오후 3~4시쯤이었던 것 같다. 정문이 아닌 2번 홀 페어웨이를 통해 마스터스대회장인 오거스타내셔날골프장에 들어갔다.

오거스타내셔날골프장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과연 이 골프장을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들었다는 말인가! ”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보다 5년 전인 1989년 페블비치골프링크스에 처음 갔을 때나, 2001년 골프의 발상지라는 세인트앤드류스의 올드코스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경이로움이었다.

그 때 가상의 라운딩을 하면서 골프장을 구경했다. 텅 비어 있는 코스를 따라갔다.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서서 티샷을 해 놓고 공이 떨어진 곳으로 쫓아가 세컨드 샷을 날린 다음 퍼팅그린에 이르러 퍼팅을 해 보는 식으로 18홀을 다 돌았다. 그러나 그렇게 한 것만으로는 오거스타내셔날골프장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변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다음날 아침 일찍 오거스타내셔날골프장을 다시 찾았다.

전날과 달리 수많은 갤러리들이 입장하기 위해 입구에 줄을 서있었다. 그리고 비록 연습 라운딩이라고 할지라도 입장료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 아니, 연습라운딩이니까 그렇게라도 입장할 수 있었던 것이지, 암표가 아닌 정규라운딩 입장권을 구하는 일이란 필자의 생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그 때 그곳에서 처음 알게 됐다. 또 오거스타내셔날골프장은 마스터스대회를 치르기 위해 3개월 전부터 문을 닫는다는 사실도 함께 알았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요즘, 각 신문사마다 골프담당기자를 파견해 현지에서 기사를 보내고 있다. TV를 통해 오거스타내셔날골프장의 장관을 쉽게 볼 수 있음도 물론이다. 그런데다가 최경주선수는 우승하게 되면 챔피언식으로 된장찌개를 내놓을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오거스타내셔날골프장에 대한 신비감이 반감되는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지난 10여년 사이에 국력이 괄목할 만큼 신장했고 골프가 대중화했다는 뿌듯함에 감격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동기 변호사·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4-21 16:46


소동기 변호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