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찾는 행복의 진실

[영화 되돌리기] 일요일은 참으세요
그리스에서 찾는 행복의 진실

지난 달 폐막한 제 58회 칸 영화제를 보면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반미, 반부시 정서가 영화계에 공동의 화두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변을 연출했던 작년과 달리 올해에는 덴마크 영화 거장 다르덴 형제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칸이 정치색을 배제하고 무난한 선택을 했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의 노예제도를 비판한 라스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만달레이’나 미국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폭력의 역사’와 같은 다수 출품작들에게서는 노골적인 반미 정서가 드러나 있다. 심지어 전혀 정치성을 노리지 않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3’도 칸에서만큼은 반부시 입장에서 해석되고 있으니 프랑스가 얼마나 미국을 싫어하는지 새삼 알 수 있다.

이처럼 미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유럽은 영화에서도 미국인들을 젠체하는 속물로, 돈만 아는 삼류로 묘사하곤 한다. 아마도 미국이 아무리 세계 정치 경제 군사적 패권국가라 할지라도 유럽국가 눈에는 천박한 졸부인 모양이다. 60년대 줄스 다신의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 (Never on Sunday)’는 이런 미국을 풍자하는 영화 가운데 고전으로 꼽힐 만하다. 이 영화는 그리스로 흘러들어온 미국인을 통해 고상한 척 교양있는 척 해도 결국 천박한 자본주의의 상징일 수 밖에 없는 미국을 비꼬고 있다.

감독인 줄스 다신은 메카시 열풍이 미국을 휩쓸 당시 동료의 고발로 블랙 리스트에 올라 도망치듯 그리스로 건너 온 망명자다. 이미 자유민주주의의 위선을 경험한 그가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를 통해 미국의 자본주의를 경멸하는 건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대신 그는 영화 속에서 순수와 자유 그리고 본능이 살아 숨쉬는 그리스를 찬양한다.

그가 찬양하는 그리스는 여주인공 일리야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일리야는 ‘신체의 자본화’를 추구하는 창녀로서 가장 친자본주의적인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화대에 관계없이 맘에 드는 고객을 직접 선택함으로써 이윤추구라는 매춘업의 기본을 무시한 반시장주의적인 인물이다. 손님이 몰려드는 주말에는 항상 아크로 폴리스에서 열리는 그리스 고전극을 보기위해 임시 휴업을 할 만큼 자유로운 일리야는 마을 남성들에게 여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영화에는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세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본능에 충실한 육체파 남자, 그리스판 리마리오 토니오, 얼굴없는 남자로 통하는 악랄한 임대업자, 그리고 미국에서 건너 온 자칭 아마추어 철학자 호머. 이 셋은 다른 방식으로 일리야를 사랑한다. 토니오는 강렬한 육체적 매력으로 그녀를 가지려 하고 얼굴없는 남자는 자본력으로 그녀를 굴복시키고자 하며 호머는 지식으로 그녀를 설복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리야를 타락한 창녀로 본 호머가 그녀를 구원한다는 명목하에 얼굴없는 남자의 더러운 돈과 결탁한다는 데 있다. 육체적 쾌락을 경멸하며 교양과 지식의 덕을 말하는 호머는 자본의 쾌락에 굴복당하는 위선자가 되고 만다. 그리고 호머에게 이끌렸던 일리야는 모든 사실을 안 후 그리스인 본연의 자유로운 모습을 되찾는다.

영화는 악보를 읽지 못해도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새처럼 지식이 없어도 지혜롭고 돈이 없어도 풍요로운 그리스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부주키(그리스 악기) 연주에 맞춰 흘러나오는 그리스 노래에 귀를 기울여 보자. 삶의 애환을 담겨있으면서도 흥겨운 그리스 음악을 듣고 있으면 행복이란 온화한 햇살 약간과 언제든지 편안하게 들 수 있는 술잔 하나,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6-15 16:35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