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대서 '절반의 성공' 거두고 다시 K리그로 복귀

다시 뛰는 박주영 한국축구 르네상스 연다
세계무대서 '절반의 성공' 거두고 다시 K리그로 복귀

네덜란드 에멘스타디움에서 열린 2005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예선 2차전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넣은 박주영이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연합>

“주영이를 비롯해 모든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울고 있어요.”

한국이 19일 새벽(한국시각) 네덜란드 엠멘에서 열린 세계청소년 축구선수권 F조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브라질전에서 0-2로 패한 직후 스타디움 믹스트존(언론취재구역). “왜 선수들이 안나오냐”는 취재진의 다그침에 청소년 대표팀 미디어 담당관의 답변이다. “분위기가 너무 침통해 라커룸에 들어 갔다가 위로의 말도 못하고 나왔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브라질전을 앞두고 “상대가 강하지만 이길 수 있다”고 말했던 박주영의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취재진은 계속 진을 쳤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주영이 경기후 국제축구연맹(FIFA)의 도핑 테스트를 받아야 했기 때문. 한국 청소년대표팀의 16강 탈락에 따른 박주영의 심정은 20일 인천 공항에서야 몇 마디 들을 수 있었다. “아쉽지만 최선을 다했다.” “배운 것도 많았다. 이번 대회를 치르면서 세계무대에서도 한번 해볼만하다고 느꼈다.” 전날 라커룸의 분위기에 비해 많이 정제되고, 미래지향적으로 다듬어진 표현이었다.

대표팀·청소년팀서 강행군
사실 박주영으로서는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출발은 화려했지만 마무리가 좋지 않았던 탓이다. 박주영은 5월 31일 인천공항을 출국, 6월 20일 귀국하기까지 3주동안 성인 대표팀과 청소년대표팀을 오가며 지옥의 강행군을 펼쳤다. “박주영이 뛰면 기적이 이뤄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잇따라 극적인 승리를 엮어내며 국민들을 축구 열기속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당초 세계청소년 선수권에서 4강을 목표로 했던 청소년 대표팀이 16강 진출에도 실패, 국민들에게 충격과 실망감을 안겨줬다. 때문에 이제는 대차대조표를 들고 그간의 행적을 냉철이 따져봐야 할 때다. 과연 박주영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우선 박주영은 이번 강행군을 통해 축구천재에서 국가 대표팀의 기둥으로 우뚝 서는 기회를 잡았다. 우여곡절끝에 본프레레호에 승선한 박주영은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우즈베키스탄전과 쿠웨이트전에서 후반 조커 정도로 기용될 것으로 예상됐었다. 하지만 첫 경기인 우즈벡전부터 선발 출장, 후반 인저리타임 때 기적같은 동점골을 뽑아내 단숨에 한국 축구의 구세주로 떠올랐다. 9일 쿠웨이트전은 박주영의 원맨쇼에 기존의 스타들의 득점포가 가세한 골잔치였다. 박주영은 전반 초반 선취골을 신고한 데 이어 팀의 두번째 골인 이동국의 페널티킥골의 발판을 놓아 한국의 4-0 대승을 견인했다. 마지막까지 대표팀 발탁을 주저했던 본프레레 감독은 “부담이 컸을 텐데 아주 잘 해줬고, 훌륭한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마디로 성인대표팀 데뷔전과 두 번째 경기에서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 대표팀에서의 상황은 달랐다. 박주영은 대회기간중 FIFA.com과의 인터뷰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살인적인 스케줄로 체력이 소진한 탓인지 기대만큼 좋은 플레이를 펼쳐 보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유럽 빅리그 스카우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을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 청소년대표팀을 이끈 박성화 감독은 조별리그 1차전인 스위스와의 경기가 끝난 뒤 “박주영이 체력적 정신적으로 지쳐 있어 전술 지시가 먹혀들지 않을 정도였다”고 토로했다. 스위스전 후반전에 최전방에 투톱(두명의 공격수를 두는 것)을 세우고 그 밑에 공수를 넘나들며 이를 받치는 처진 스트라이커 역할을 박주영에게 맡겼는데 제대로 뛰지 못해 스리톱 형태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박 감독은 “박주영이 나이지리아전 동점골 등 나름대로 잘해 줬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을 최대한 발휘, 세계시장에서 특출한 플레이를 보여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유럽 빅리그 진출에 엄청난 손해를 봤다”고 진단했다.

물론 이런 얘기는 박주영의 성인대표팀 차출과 체력 저하로 마음고생을 해야 했던 청소년 대표팀 감독의 주장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전혀 틀린 말이라고 내치기도 어렵다. 박주영이 이번 대회에서 FIFA가 뽑은 14명의 스타 명단에 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FIFA.com은 ‘네덜란드의 14인 스타’라는 기사에서 조별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 14명을 골라 이들의 활약상을 전했는데, 아시아인으로는 중국의 수비수 펑샤오팅이 포함됐을 뿐 박주영은 없었다.

이번 대회에서는 유럽 빅리그 클럽팀에서 일하던 스카우트 수십명이 싹이 보이는 선수들을 발굴하기 위해 경기장을 뒤지고 다니는 장면이 목격됐다. 이 가운데 잉글랜드 독일 네덜란드의 5~6개 팀 관계자들이 박주영을 유심히 지켜봤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세계 톱클래스 수준 입증
그렇다면 박주영의 진정한 기량은 어느 정도일까. 같은 또래의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팀이 고전한 것은 1명의 박주영이 11명의 박주영이 뛰는 팀들과 맞붙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박주영이 나이지리아전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프리킥과 돋보이는 볼 컨트롤은 또래 선수들에 비해 군계일학이었다. 이번 대회 브라질 나이지리아 아르헨티나 등 강팀들의 경기를 현장에서 관전했지만 박주영보다 기량이 월등히 뛰어난 선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박주영은 청소년급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다만 이번 조별 리그 3경기에서 박주영의 플레이는 성인 대표팀 때보다 부진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공수 양측면에서 활동폭이 좁았고 적극성도 부족했다. 이전에 만났던 수비수들과는 한 차원 다른 선수들 앞에서 자유롭게 슈팅을 날리지도 못했다. 때문에 불안전한 찬스나, 여러 명의 집중 마크속에서도 골을 터트리는 능력을 더 키워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번 청소년 대회를 통해 무엇보다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는 점은 박주영으로서는 큰 소득이다.

현재 박주영은 소속팀인 FC서울로 복귀, 몸을 추스리고 있다. 장장 3개국에 걸쳐 1만2,000㎞의 대장정을 하며 성인대표팀과 청소년팀에서 5경기를 풀타임 소화한 탓에 체력 회복에 힘을 쏟고 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때마침 선배인 박지성이 프리미어 리그 진출에 성공, 박주영으로서는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박지성은 21세 때인 2002년 한일월드컵을 통해 군대문제를 털어내고 네덜란드 리그로 진출, 유럽 빅리그로 가는 발판을 닦았다. 내년이면 박주영도 21세. 박지성의 케이스가 하나의 참고가 될 듯하다.

박주영은 9일 쿠웨이트전이 끝난 뒤 “내년 독일월드컵에서 뛰고 싶다. 열심히 준비를 해서 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20일 귀로의 인천공항에서는 유럽 빅리그 진출에 대해 “많이 배워서 실력이 업그레이드된 뒤 도전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일단 K리그를 통해 다시 일어서고 내년 독일월드컵을 통해 월드스타로 도약, 유럽 빅리그로 간다는 구상이다.

명지대에서 박지성을 지도했던 김희태 포천 축구센터 총감독은 박주영에 대해서도 “자질과 기량이 훌륭하다. 경험을 더욱 쌓으면 대성할 수 있다. 내년 월드컵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면 박지성에 이어 유럽 빅리그 진출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주영의 에이전트측도 “올시즌 K리그 중흥을 위해 뛰고 유럽무대 진출은 그 이후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주영은 그 동안 국가대표팀과 청소년 대표팀 차출로 K리그 전기 리그 5경기를 결장했다. 25일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원정경기를 시작으로 한국 프로축구의 르네상스를 위해 다시 출격한다. “박주영이 뛰면 꿈은 이뤄진다”는 것을 팬들에게 입증해 보이겠다는 각오다.


박진용기자


입력시간 : 2005-06-30 16:34


박진용기자 hub@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