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아름다운 로맨스를 낳다

[시네마타운] <사랑니>
유혹…아름다운 로맨스를 낳다

연상녀 연하남 커플의 로맨스는 최근 한국 문화의 트렌드다.

파격적인 나이 차를 극복하는 연상녀 연하남 커플의 이야기가 드라마 단골 소재가 된 지는 이미 오래고 “누나는 내가 지켜줘야지”, “선배는 머리를 푼 게 더 예뻐요” 운운하는 꽃미남 동생들의 멘트를 담은 TV 광고가 등장하기도 했다.

영화라고 예외는 아니다. 중년의 편집장과 사랑에 빠진 ‘누나’에 대한 연심(戀心)으로 괴로워하는 청년의 이야기 <질투는 나의 힘>에 이어 <사랑니>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로맨스를 주고 받는 이들은 학원 여선생과 남학생으로 줄잡아 띠 동갑을 훌쩍 넘긴 터울이다. 이쯤되면 ‘막 나가자는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하지만 <사랑니>는 우리 사회의 윤리적인 잣대로 그것을 판단하기 전에 첫사랑, 보다 광범위하게 ‘사랑’과 ‘열정’이라는 감정에 대한 본질적인 생각으로 우리를 이끈다.

아무도 모르게

잃어버렸던 첫사랑의 열정은 어떻게 다시 불타오르는가.

사색적인 판타지 멜로 드라마 <사랑니>에 그 해답이 있다.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여교사 조인영(김정은)은 어느 날 자신의 수업을 듣는 남학생 이석(이태성)에게 눈이 꽂힌다.

이석은 인영의 첫사랑과 동명이인이며 얼굴도 판박이고 저돌적인 성격까지 꼭 닮았다. 인영의 마음을 아는 지 열일곱 소년 역시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될 스승에게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한다.

세상의 이치로 보면 가당치도 않을 이 여선생과 남제자의 로맨스는 이석의 여자친구와 인영의 과거 첫사랑이 나타나면서 기이한 방향으로 굴절된다.

<사랑니>는 두 개의 단락으로 구성된다.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는 중간 지점에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다.

중반이 지나면 애초의 설정에 대한 부담감은 아예 종적을 감춘다. 이 순간부터 <사랑니>는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게 만드는 들끓는 열정에 관한 이야기로 방향을 선회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의 미스터리를 흐트리고 캐릭터의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담한 반전 때문에 관객은 일시적인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혼돈의 드라마는 수습되고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와 테마가 펼쳐진다. 드라마는 어느 순간 급격하게 방향을 틀고 관객들은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극장 문을 나설 지도 모른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영화를 본 관객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모습을 상영 도중 객석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사랑니>는 정지우 감독이 7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영화다. IMF 시절, 실직한 남편을 둔 주부 가장의 대담한 외도를 그린 <해피엔드>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정지우는 열일곱 살 남학생과 사랑에 빠지는 서른 살 여선생의 이야기로 다시 한 번 우리의 감성을 도발한다.

불륜에 얽힌 치정살인이라는 소재를 통해 윤리적 판단을 내리도록 한 전작과 달리 <사랑니>는 주인공이 처한 도덕적 딜레마에 방점을 찍지는 않는다.

<해피 엔드>에 이어 정지우가 던지는 질문은 또 다시, ‘당신은 행복한가’이다. 길바닥에 깔려 죽은 고양이를 보게 될까봐 에둘러 길을 돌아오라고 전화를 해주는 살가운 동거남이 있지만 인영의 삶은 심드렁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꼿꼿하게 살아있었던 최초의 열정을 잃어버린 채 순응과 적응의 태도를 체화한 ‘생활인’이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첫사랑을 닮은 소년은 그런 인영에게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소생시키는 매개다.

체면을 버리고 행복해져

<사랑니>는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 보다 소진된 열정의 회복을 촉구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첫사랑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영화치고는 너무 난해하다고 못마땅해 했지만 어쩌면 이건 행복추구권을 주장하는 한 여자의 지엄한 자존선언 같다.

어느 순간 인영의 행동은 분별력있는 어른의 그것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학원 운영愍?친구와 학생들, 심지어 쿨한 연인이자 룸메이트, 친구인 정우조차 그녀의 열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인영은 다시 찾아온 사랑과 열정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이기적이 된다. 제자뻘되는 여고생과 연적이 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공공장소에서 클랙슨을 울려대며 소년에 대한 사랑을 시위하기도 한다. 정지裏?영화에서 여자는 행복을 위해 양심과 체면을 버린다.

<해피엔드>의 바람난 주부 역시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정부를 만나는 극악스런 행동을 서슴지 않으며 자신의 행복추구권을 지키려 했다.

유아기적으로까지 보이는 인영의 행동에 비하면 극의 중간에 나오는 반전은 딱히 충격적이지도 않다. 차라리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혼란을 가중시키는 쪽이다.

영화의 제목인 ‘사랑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지만 7% 내외의 사람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랑니가 난 사람들 중에도 그것으로 인해 대단한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 고통 없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사랑의 통증도 마찬가지다. 사랑니를 앓고 뽑는 고통처럼 누구에게나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경험한 후에는 훌쩍 자라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김선아, 김원희와 더불어 코미디에 적합한 여배우로 통하는 김정은의 변신은 볼 만하다. 김정은은 배우로서 자신이 겪고 있는 최대 난제를 극복해낸 듯하다.

동시대 여배우들과 조금 다른, 웃음을 유발하는 재능으로 인정받은 그녀는 자신을 옭아맨 가벼운 이미지를 털어버리기 위한 무던한 노력들(<나비><내 남자의 로맨스> 등)이 모두 무위로 돌아간 뒤 제대로 된 변신을 보여준다.

<사랑니>는 코미디 배우 김정은의 최고작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영화 이후 웃기는 영화에 그녀를 다시 기용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장병원 영화 평론가


입력시간 : 2005-10-1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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