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은 나의 힘

미국 유명 란제리 브랜드 ‘빅토리아즈 시크릿(Victoria's Secret)'은 관능적이고 화려한 이미지로 유명하다.

그런데 검정색 실크와 분홍 레이스로 고혹적이면서도 퇴폐적인 느낌의 이 속옷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여성성을 억압했던 시대로 알려져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이름을 딴 ‘빅토리아의 비밀’이다.

‘빅토리아(시대)의 비밀’이란 말 속에는 억압의 시대에 감추어진 여성들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

여성에게 순결을 강요하는 억압의 시대에 비밀스레 감추어 둘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퇴폐적 욕망과 금욕을 숭상하는 그 시대에 그녀들을 사로잡았던 속물적 허영심, 이것이 바로 그 시대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작가 윌리엄 메이크피스 테커레이는 이러한 빅토리아 시대의 위선적인 비밀을 소설 ‘베니티 페어(허영의 시장)’를 통해 까발렸다.

순결과 금욕 대신 관능과 허영의 속옷을 걸친 여자 주인공 ‘베키 샤프’를 통해서 말이다.

‘천로역정’을 쓴 17세기 청교도 작가 번연이 처음 사용한 ‘베니티 페어’라는 말은 허영에 찬 물건들이 거래되는 시장으로 소설 속에서 허영으로 가득찬 상류사회를 조롱하는 의미로 읽힌다.

소설의 주인공 베키 샤프는 가난한 화가의 딸로 태어나 강한 신분 상승 욕구를 갖고 있다.

그녀는 비천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족 가문 크롤리가의 가정 교사가 되고 그 곳에서 재력가 집안의 친구 아멜리아의 오빠 조스를 만나게 된다.

베키의 상류사회 진입에 디딤돌이 되어줄 수 있는 아멜리아의 오빠는 베키의 매력에 흠뻑 젖어 든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속물같은 약혼자 조지의 만류로 조스는 비천한 출신에 가진 것 하나 없는 베키를 떠나보낸다.

하지만 베키는 자신의 총명함과 재치로 크롤리가의 거부 마님 미스 크롤리의 환심을 사게 되면서 또 다른 운명을 맞이한다.

그의 새로운 남자는 미스 크롤리의 매력적인 조카 로든 대위. 로든 대위와 비밀 결혼을 올리게 되는 베키는 신분을 초월한 이들의 관계를 반대한 미스 크롤리로 인해 사랑의 도피를 한다.

사랑은 얻었지만 상류사회로의 진입이 어려워진 베키는 재기넘치는 자신만의 매력으로 야심을 이뤄내고자 한다. 하지만 허영의 탈은 진실한 사랑을 잃게 만든다.

영화는 주인공 베키의 흥망성쇠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 사교계의 숨겨진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화려하게 치장된 파티장 이면에 숨겨진 일그러진 명예욕과 권력욕, 관능의 유희에 힘없이 무너지는 속물들의 얄팍함, 우아한 듯 고상한 듯하지만 결국은 가장 천박한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위선이 영화 속에서 낱낱이 드러난다.

하지만 시대에 대한 조롱보다 더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시대에 대한 탁월한 고증이다.

19세기 유행했던 엠파이어 스타일의 드레스에서 인도,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던 최고 전성기의 영국답게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나는 건물이나 소품까지 영화의 디테일 하나하나에 시대적 양식이 담겨있다.

특히나 이 영화에서는 강렬한 인도풍의 색감이 인상적이다. 영국이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인도에 문화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탓도 있지만 영화를 감독한 감독(미라 네어)이 인도 출신이란 점도 한 몫 했을 듯 싶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를 완벽하게 고증해내는 것은 의상도 소품도 아니다. 인도를 동경해서 결국 인도로 떠나게 되는 베키라는 인물 자체가 빅토리아 시대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연하고 있다.

허영에 가득차 있고 동양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갖고 있지만 오리엔탈리즘적인 허상에 빠져있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그 시대의 환상과 우울이 주인공 ‘베키 샤프’의 부침많은 삶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