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 편 볼 기회가 있었다. 미국의 희극작가 닐 사이먼의 ‘굿닥터’를 재구성한 연극으로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연출가 왕용범의 작품이었다.

연극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도통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더 생소한 일은 따로 있었다.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 하나 둘씩 채워지는 객석들. 연극이 눈에 띄게 대중화된 문화 장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평일 저녁 소극장을 찾은 관람객이 생각보다 많았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사실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는 것.

이는 취향의 고급과 저급을 불문하더라도 문화를 향유하는 데 있어 여성이 남성보다 적극적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연극을 좋아하는 여성들이 모두 연애에 빠져 남자 애인과 함께 소극장에 오기만 해도 연극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대중화되지는 않을까?

적어도 프랑스 영화 ‘타인의 취향’을 보면 남녀 간의 연애가 연극의 대중화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는 필자의 가정에 동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취향과 문화의 전파를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타인의 취향’의 주인공은 취향을 고작 식성의 다른 표현이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교양없이 천박한 중소기업 사장 카스텔라다. 그런 그가 어느날 관심에도 없는 라신의 연극을 보게 되고 그 자리에서 연극의 주연배우이자 자신의 운명의 여성인 클라라를 만난다.

클라라는 프랑스 파리의 전형적인 문화예술인으로 연극, 미술, 음악에 두루두루 조예가 깊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예술가의 천형 ‘가난’이 그녀를 따라다녔기에 평소 속물이라 경멸한 카스텔라의 영어선생님으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클라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카스텔라는 클라라의 문화계 친구들과 어울리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얄팍한 지적 수준만 드러내 보이고 망신만 당하기 일쑤다. 그래도 카스텔라는 꿋꿋하게 연극을 관람하고 그림을 사 모은다.

타인의 취향을 자신의 취향으로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카스텔라와 달리 카스텔라의 부인 앙젤리끄는 타인을 자신의 취향대로 만들려는 욕심 때문에 눈총을 받는다.

꽃무늬를 활용한 로맨틱 인테리어를 좋아하는 앙젤리끄는 자신의 시누이인 베아트리스의 집을 제멋대로 꾸미고 카스텔라가 공들여 사온 포스트모던 풍의 그림마저 치워버려 독단적인 취향을 고수하려 한다.

이외 주변 인물들의 삶 속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소박한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랑했던 여자에게 배신당한 후 사랑 불신병에 걸린 고독한 남자 프랑크, 소심해서 애인에게 차여도 혼자서 실연의 아픔을 달래는 남자 브루노. 사랑에는 콧방귀를 끼고 연애와 섹스에는 솔직한 여성 마니.

영화는 이렇게 각양각색의 취향을 가진 주인공들의 삶에 명확한 답을 주는 대신 취향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맺이 않는 인생의 난해함을 깨닫게 해준다. 프랑스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낯선 것은 이처럼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결말 때문이다. .

‘달걀 반숙이냐 완숙이냐’,‘꽃 무늬냐 스트라이프냐’,‘라신이나 몰리에르냐’ 인생에서 결정적 갈등의 시작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취향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건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어느 신을 섬기는지, 어떠한 체제를 신봉하는지, 이러한 정치 경제의 문제도 취향의 연장이라고 본다면 ‘타인의 취향’을 배려하는 일이 지구상에 충돌의 지뢰를 하나씩 제거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 그래도 마호메트 풍자 만화로 유럽과 이슬람 간에 또 다시 종교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이 때, 이 영화는 타인의 존중과 이해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