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월드컵 WBC 한국팀 사령탑 "내 욕심에 끝은 없다" 자신감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스타군단 조율, 한국야구 재도약 견인

춘추전국시대 위나라에 오기(吳起)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孫武)와 함께 중국 최고의 병법가로 꼽힌다.

오기는 덕장(德將)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그는 병사를 끔찍히 사랑한 나머지 함께 먹고 같이 잤다.

한 병사의 다친 다리가 곪자 오기는 입으로 고름을 빨았다. 이 소식을 들은 병사의 어머니는 “내 아들이 죽게 생겼다”며 통곡했다. ‘장군이 말단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는데 그런 병사가 장군을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아끼겠느냐’는 뜻이었다.

신출귀몰한 병법의 대가 제갈공명은 지장(智將)이면서 용장(勇將)이었다. 총애하던 장수 마속이 가정 전투에서 명령을 어기자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주위에서 “유능한 마속을 없애면 적에게 이로울 뿐”이라며 처형을 말렸다.

하지만 제갈공명은 단호하게 “그대의 말이 맞지만 군율은 꼭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삼국지의 명장면 제갈공명이 울면서 마속을 벤다(泣斬馬謖)는 대목이다.

오기처럼 사랑을 베풀어서 충성심을 자아내는 덕장과 제갈공명처럼 잘못한 부하의 목을 가차없이 베는 용장 가운데 누구의 방법이 조직을 이끌어 가는데 더 효율적일까.

아마 정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야구의 세계는 용장이 득세했다.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에 빛나는 김응용 삼성 라이온즈 사장(65)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 사령탑을 맡아 영원한 맞수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수확했다.

하지만 또 다른 용장 김재박 현대 감독(52)이 이끈 한국 대표팀은 200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 수 아래로 여겼던 대만에 무릎을 꿇었다. 이 때의 패배로 한국은 2004아테네 올림픽 진출이 무산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지난해 가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팀 사령탑에 국내 프로야구에서 대표적인 ‘덕장’으로 평가되는 김인식 한화 감독(59)을 임명했다.

김인식 감독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통해 아시아 지역예선 통과 여부가 걸린 대만을 격파하길 바랬기 때문이다. 아시아선수권대회의 참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용장보다 덕장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국제 대회 부진에 빠진 한국야구의 구원투수로 나선 ‘재활의 신(神)’ 김인식 감독이 요즘 국내 야구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WBC대회, 프로야구 흥행의 시금석

WBC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국가대항전.

KBO는 올해 ‘WBC 4강 진출로 400만 관중을 동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KBO는 “한국이 WBC 아시아 예선에서 탈락한다면 올 시즌 프로야구 관중은 200만에 머물 것이고, 본선에 진출하면 300만, 4강에 진출하면 400만 관중 시대를 열 것”이라며 WBC에 한국 프로야구의 사활이 걸려 있음을 강조했다.

김인식 감독도 “WBC는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갖춘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출전하는 만큼 예전의 국제대회와 차원이 다르다”면서 “한국이 WBC에서 어떤 성적을 거두냐에 따라 한국 프로야구의 흥행이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WBC를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온다”는 김 감독은 밤마다 예선 통과의 관건이 될 대만전을 대비해 주요 선수의 경기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분석하고 있다.

김 감독은 “한국 대표팀의 목표는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면 밝히겠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목표는 밝히지 않았지만 본선 진출 이상의 성적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 감독은 “본선에 진출하면 맞붙을 미국, 일본을 비롯해 캐나다 또는 멕시코는 모두 우리보다 전력이 앞선다. 그러나 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욕심은 끝이 없다”고 귀띔했다. 4강 진출을 노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시아 예선에는 한국, 일본, 대만, 중국 등 4개국이 참가한다. 한국은 일본보다는 약하지만 대만보다는 강하다는 평가. 따라서 한국이 대만에 일격을 당하면 예선 탈락할 가능성도 있다.

믿음과 칭찬의 리더십

김인식 감독의 리더십은 믿음과 칭찬으로 요약된다. 그는 후보에게도 기회를 주고 아무리 성적이 나빠도 믿고 기다린다.

병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장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던가. 선수는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뛰게 된다.

악동으로 유명한 용병 타자 데이비스는 지난해 김 감독의 인품에 반해 “당신은 진정한 나의 보스입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믿음의 야구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훈련하는 자율야구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김 감독은 좀처럼 선수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단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장점을 칭찬한다.

KBO가 김 감독에게 대표팀을 맡긴 이유도 스타들이 즐비한 대표팀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하려면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그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프로 선수쯤 되면 자기 잘못을 안다. 감독이 꾸짖으면 혼났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만 쌓인다. 꾸짖기보다는 다독거려 주는 것이 효과가 크다”고 말한다.

김 감독은 2004년 12월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병문안을 간 야구인들이 김 감독의 야구인생이 끝났다고 판단할 정도로 병세는 심각했다. 그러나 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기적을 만들었다.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긴 그는 “한국 프로야구의 재도약을 위해서라도 WBC에서 꼭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고 다짐했다.

승부사에게 절대선은 승리

승부의 세계에서 절대선은 오직 승리뿐이다. 김응용 감독 시절의 해태가 그랬고, 현대 전성기를 이끈 김재박 감독이 그랬다.

이들은 ‘야구는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승패를 점칠 수 없다’고 믿었다. 두 용장은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어도 타자에게 번트를 지시했고, 잘 던지던 투수도 안타 하나에 마운드에서 끌어내렸다.

김인식 감독이 부드러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뱀처럼 차가운 승부사 기질이 있다. 다만 승부처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릴 줄도 알지만 막히면 돌아가는 여유도 갖고 있다.

그는 상황에 따라 경우의 수를 점검한 뒤 확률 높은 야구를 추구한다. 김인식 야구에 번트보다 정면돌파가 많다는 사실 또한 타자를 믿어서가 아니라 목표와 확률에 따른 선택일 뿐이다.

김 감독은 3회 이전에는 좀처럼 번트를 지시하지 않는다. 1점으로 승리가 보장되지 않아서다. 경기 후반에도 1점 승부가 아니면 정면돌파를 선택할 때가 많다.

다득점이 가능할 때는 번트로 1점을 확보하는 것보다 아웃카운트를 하나 줄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두산을 두 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프로야구의 재도약을 다짐한 ‘재활의 신(神)’은 일본, 대만과의 한판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1주년 행사를 갖는 등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정치인 출신인 신상우 KBO 총재가 일본 출국 인사차 청와대에 들렀을 때 “대만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본을 꼭 꺾어달라”고 말했다.

김인식 감독으로서는 크게 부담을 느낄만한 ‘대통령의 민원’이었다. 취재진들이 여기에 대해 소감을 물었지만 그는 특유의 어눌한 표정으로 “그냥 한마디하신 거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기자들은 별로 없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를 분명히 알고 있는 승부사 김인식은 이미 격전의 중심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3월3일 대만과 첫 경기를 갖고 4일 중국, 5일에는 일본과 싸운다.


이상준 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