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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권의 '그 남자의 책 198쪽'
연인의 감성을 영장없이 생포한다
과거의 기억·현재의 치유·미래의 만남 등 바르트의 철학 영화로 입증





문학산 (영화평론가)



가을은 봄과 여름을 기억하며 단풍든다. 봄과 여름에 대한 기억은 가을이 감당할 숙제이자 기념할 만한 추억과 지우고 싶은 사건의 총정리 목록으로 작성된다. 가을은 그리움의 중간 결산이자 아쉬움의 잔고정리를 하는 계절이다. 가을은 헤어진 연인에게 받은 오래된 편지를 다시 꺼내보는 심정으로 멜로드라마를 찾게 한다.

김정권의 <그 남자의 책 198쪽>은 한국의 가을 풍경을 도배하여 한국 연인의 감성을 체포영장없이 생포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중영화다. 이 작품은 원작과 영화의 거리를 생각하게 하고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치유를 성찰하게 한다.

우선 <그 남자의 책 198쪽>은 윤성희의 원작을 토대로 시나리오 작가가 창조적인 각색을 하고 김정권 감독이 자신의 주무기를 활용하여 한편의 고품격 멜로영화로 완성했다.

영화는 시나리오 작가의 창조적 각색과 연출자의 연출의도로 원작의 인물과 몇 가지 사건만을 수용하고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났다.

전작 <바보>에서는 원작에 충실하는 것과 원작을 토대로 재가공하는 것 중에서 전자에 발목 붙들린 흔적이 역력했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 <바보>는 강풀의 원작을 카메라로 성실하게 옮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유일한 미덕일 정도로 원작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하지만 <그 남자의 책 198쪽>은 남자와 여자의 이름과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살리고 남자 준오(이동욱 분)의 과거사를 새로 만들어 넣으면서 과거의 상처에서 치유되는 과정을 차분하게 따라가게 된다.

영화는 연인을 교통사고로 잃은 준오가 스스로 과거의 상처로부터 치유되는 과정과 사서인 은수(유진)가 준오의 치유를 도와주면서 스스로도 위장병으로부터 치유되고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는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원작에 없는 두 번의 여행도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처음은 준오의 헤어진 여자 친구 집을 찾아가는 여행이며 두 번째는 상처 치유를 위한 청평사 여행이다. 두 여행은 프레임에 가득 찬 한국의 가을 풍경을 담아내며 동시에 두 남녀의 추억과 연애 감정이 생성될 기회를 부여한다.

윤성희의 원작 소설은 여주인공의 직업이 사서라는 것과 도서관에서 이마에 갈매기 상처를 달고 다닌 ‘갈매기’(익명의 남자에게 붙인 애칭)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사서는 갈매기가 헤어진 연인이 전해준 쪽지에 ‘ 000책 198쪽을 봐. 너에게 전해 주고 싶은 내 마음이 거기 있어’라는 메시지를 읽고 그 남자의 일을 도와준다.

그리고 그 남자가 서가에 거꾸로 꽂아둔 책에 메모된 쪽지를 읽고 공원의 잡동사니 파는 사람에게 가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읽게 된다. 그리고 갈매기는 사라지고 오징어 파는 남자가 갈매기일 것으로 생각한다.



원작은 사서가 주인공이며 갈매기라는 남자에게 헤어진 여자 친구가 남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룻밤 도와준 것이 두 남녀가 보여준 사건의 전부이다. 원작은 여자 사서의 내면과 일상과 실연이 절반 채워지며 그녀의 일상 중에 하나의 사건으로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건네받은 메시지를 해독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198쪽을 뒤적이는 문제적 인물인 남자가 들어올 뿐이다.

김정권은 자신의 남다른 감수성으로 사랑과 기억을 집어넣어 한편의 멜로영화로 완성했다. 김정권의 멜로는 여타의 멜로 영화와 차별화된다. 멜로영화는 두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하고 헤어지거나 결혼을 한다는 서사 골격을 따른다. 헤어짐의 원인은 그 사회와 시대의 도덕률과 관습에 따른 장애물로 인해서다.

하지만 김정권의 멜로 영화는 <동감>처럼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두 남녀가 만나는 순간에 엔딩 크레딧을 올려버린다. 김정권 감독의 멜로 영화는 기존의 멜로 영화가 두 남녀의 만남 이후를 강조했던 것에 비해 두 남녀의 만남까지만 보여주고 마무리한다.

<그 남자의 책 198쪽>도 은수와 준오가 각자의 과거로부터 치유되어 만나게 되는 순간에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그의 영화는 과거의 연애사에 대한 집중 보다는 미래의 연애에 대한 기대를 선물하는 것에 더 공들인다.

사랑은 너무나 많은 정의가 난립한다. 평생 자신의 영화 주제가 사랑이었다고 밝힌 바 있던 배창호 감독은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마음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사랑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면서 “과거에는 고통스럽게 마음을 주었고 지금은 고통없이 마음을 준다”고 했다. 주는 사랑이 사랑의 본령에 가깝지만 실천하는 일은 1톤의 바위를 맨손으로 들어서 옮기는 일 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사랑의 경험자들은 수긍할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폭력적 사랑으로 이목을 끌었던 김기덕 감독은 "자학과 피학이 엉클어져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김기덕 감독은 감독이라는 직업에 대해 “비극이든 희극이든 극장에서 100분 동안 사랑의 감정을 실어 날라야하는 사람”으로 정할 만큼 사랑의 문제를 귀하게 여겼다. 김정권 감독에게 사랑은 뭘까.

이 영화를 통해 바라보면 두 사람이 함께 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남겨진 자에게 미래라는 이름의 여백에 새로운 기억을 기록해갈 기회를 부여하는 것. 남겨진 이들은 상처의 기억이라는 사슬에 발목 붙들리지 않으며 상호 위로하고 치유하면서 미래의 시간과 전망을 공유한다.

바르트의 말대로 ‘사랑했던 대상은 늘 떠나는 철새였고 남겨진 이들은 사랑을 기억해야하는 운명’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다. 김정권은 바르트의 철학을 영화로 입증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주석을 한줄 첨가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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