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권 인디뮤직 대표 록밴드 중 하나분노를 정화시킨 트롤로지의 완결편리더 이기용 독립 레이블 창립 음악과 완벽한 연인관계 선언

1997년에 결성된 ‘허클베리핀’은 홍대권 인디뮤직을 대표하는 록밴드중 하나다.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1집과 3집 두 장의 앨범을 올린 이들의 음악은 쉽게 재단하기 어렵다.

데뷔시절 분노가 폭발하는 것 같은 파괴적이고 강력한 사운드만으로도 이미 차별적이었다. 이후 파워풀한 사운드에다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멜로디와 삶의 치열함과 분노를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해내는 수준으로까지 진보하고 있다.

음악적 핵심은 리더 이기용이다. 많은 대중과 평론가들로부터 신중현, 한대수에 필적하는 최고의 송라이터로 평가받는 그는 차세대 한국대중음악의 거장 재목감임에 분명하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그의 음악에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제공하는 원동력이 있다. 2집부터 동지가 된 여성 록커 이소영의 탁월한 곡 해석력에 기인한 가창력이다. 언뜻 남성의 보컬로 착각하게 하는 그녀의 중성적인 음색과 노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풀어내는 감정조절의 이완능력은 실로 압권이다.

어느 뮤지션에게나 발표한 모든 앨범에 음악적 색채를 달리하면서 동시에 뛰어난 음악성을 담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허클베리핀의 모든 앨범은 빠트릴 것이 없다.

1998년 발표된 1집 ‘18일의 수요일’은 한국 록의 불후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3년의 공백 끝에 발표한 2집 ‘나를 닮은 사내’도 최고의 싱글 트랙을 담은 수준급의 음반이지만 뛰어난 음악성과 상업성의 현실적 괴리가 극명한 우리 대중음악계의 서글픈 단면을 보여주었다.

1집 이후 기타 이기용, 보컬 이소영과 드럼 김윤태의 라인업으로 재구성되었다. 2집은 바이올린, 비올라 등 현악기를 도입해 획득한 서정성만큼이나 음악적 아우라가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어렵게 시작한 2집 녹음 때 이미 3집 녹음작업이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리더 이기용은 “2집 녹음 일정은 너무 타이트했다. 여유롭게 돌아보면서 곡을 수정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쫓기듯 작업하는 환경에서 노래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불안한 영혼’, ‘연’, ‘민요’, ‘I KNOW’ 같은 곡들을 뺐었다.”고 털어놓는다.

2004년에 발표한 허클베리 핀 3집 ‘올랭피오의 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앨범이다. 리더 이기용에게는 음반의 의미를 넘어선 중요한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우선 스스로 독립 레이블을 창립하는 계기가 된 음반이다. 제작자가 없다면 마음에 드는 앨범을 직접 제작하겠다는 중대 결심을 했다.

사실 3집 이전까지 그는 음악과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에 전업 뮤지션으로 평생을 살아갈 확신을 가지질 못했다. 그런 면에서 3집은 스스로 아티스트라는 삶에 인생을 걸겠다는 결심이자 음악과 완벽한 연인관계를 맺은 선언이기도 했다.

이기용은 “3집 작업 때 상대가 100점짜리가 아닌 불안한 연인관계라도 끝까지 가자고 마음을 먹으니 모든 갈등이 사라지고 음악이라는 본능의 바다에 비로소 푹 빠질 수 있었다. 소중한 노래를 돈을 벌기위해 이용하기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회고한다.

음악적으로도 3집은 1998년부터 그때까지의 음악을 정리하는 트릴로지의 완결 편 같았다. 1집은 간결한 사운드로 직설적인 분노, 폭발, 달려가는 화난 모습이 주된 이미지였다면 2집은 격한 감정 후 남는 쓸쓸하고 고독한 정서의 이미지였다. 3집은 분노를 정화시키는 삶의 진지한 고민이 반영된 한결 성숙된 이미지다.

실제로 녹음작업을 했던 토마토 공격대 스튜디오에서 ‘이제 그만하라’고 했을 만큼 이 앨범에 들인 그의 땀과 노력은 눈물겹다. 놀랍게도 녹음시간은 480시간에 이른다고 한다.

2003년 중반, 녹음완료 후에도 만족스런 사운드를 위해 뉴욕 청킹 스튜디오에서 일부 작업이 진행되었다. 3집 녹음작업을 통해 이기용은 음악적 변화와 더불어 홀로서기라는 삶의 변화를 선택했다. 허클베리핀의 최고 명반인 3집은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