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독집이 유작 앨범된 '가요계의 집시'동양에서는 나올 수 없는 목소리 평가고향에 대한 그리움·삶의 고뇌 담긴 8곡 거칠고 떨리는 절창으로 노래

80-90년대는 조동진에 의해 대두된 ‘언더그라운드 가수’가 화두였던 시대다. 가수, 작사, 작곡자, 연주자, 제작자가 제각각이었던 이전의 대중음악계의 분업시스템은 그들에 의해 붕괴되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감성과 음악성으로 무장된 아티스트의 대거 등장은 들을 만한 음악의 양산이라는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졌다.

그 시대를 풍미한 빛나는 뮤지션들 중에는 ‘한대수와 전인권 보다 더 걸쭉하고 개성적인 보컬’을 선보인 박경이란 미지의 뮤지션이 있다. 만약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면 대중음악을 진지하게 들어온 청자일 가능성이 높다.

90년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기인으로 회자되었던 그는 '재미있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모토였던 '가요계의 집시'였다.

워낙 예측불허의 기인이라 마광수의 소설에도 등장했고 기인열전에도 등재가 될 정도였다. 특유의 입담과 기행으로 사람들을 때론 힘들게 때론 놀라게 했지만 동시에 즐거움도 안겨준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의 짧은 음악인생은 작고한 유재하와 신광조의 슬픈 운명과 닮은꼴이다. 첫 독집이 곧 유작앨범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간 박경은 고향 부산에서 '종고'라는 이름의 파트너와 남성듀오 '들불'을 결성해 무명가수생활을 시작했다. 취미로 노래를 시작한 그는 그림에 재능이 많았다.

정식으로 음악과 미술 공부하지는 않았기에 예술적 자질은 타고났던 것 같다. 부산공연을 갔다가 매력적인 허스키 음색에 반했던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그의 서울진출을 도왔다.

상경한 듀오 '들불’은 들국화 최성원이 기획한 80년대 최고의 컴필레이션 앨범 '우리노래전시회'의 3집(1988년)에 '울면 안돼'를 취입하며 공식데뷔를 했다. 박경은 앨범의 재킷 일러스트도 담당했다.

짧은 활동 후 박경의 솔로 독립으로 듀엣은 자연스럽게 해체의 수순을 걸었다. 생활력이 강했던 그는 가수 이장희의 부인이 운영했던 강남 뱅뱅 사거리 인근의 카페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최성원은 “그는 한대수의 노래를 한대수보다 더 투박한 경상도 억양으로 멋지게 소화했다.”고 기억한다.

이후 창작 작업에 몰두했다. 그 결과 1990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 대도레코드 녹음실에서 독집 앨범을 제작했다

. 수록곡은 타이틀 곡 새벽과 바다야, 한 개피 푸후, 경의선, 데뷔곡 울면 안돼 등 총 8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삶에 대한 자신의 고뇌가 담겨진 곡들을 그는 거칠고 떨리는 절창으로 노래했다.

앨범재킷은 그의 디자인이다. 세션으로 참여한 24명의 뮤지션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룹 들국화의 주찬권, 최구희. 손진태와 국내 유일의 아트 포크록 뮤지션으로 급부상한 김두수, 블루스 기타의 달인 김목경, 김광석, 이종만 등 당시로는 국내 최고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세션으로 참여했다. 그래서 이 앨범은 포크 , 록과 재즈 그리고 클래식 분위기가 공존하는 다양한 음악 어법이 혼재되어 있다.

첫 독집을 제작할 당시 주 무대는 경기도 일산의 '백마 화사랑' 카페였다. 당시 그곳은 김목경, 강산에 등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집합소였다.

1집 앨범은 당대의 음악 마니아를 중심으로 ‘좋은 음반’으로 입소문을 타긴 했지만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1996년 재킷과 앨범 타이틀을 바꾸어 'FEED BACK LIFE OF PARK KYUNG'으로 CD제작되어 직접 운영했다는 경기도 장흥과 일산 장항동의 카페에서 판매를 했었다.

그는 대중보다 음악인들이 더욱 좋아했던 뮤지션이다. ‘동양에서는 나올 수 없는 목소리'로 그를 기억하는 뮤지션도 많다. 대중적 평가나 조명 없이 사라진 그의 유일한 LP음반은 90년대 음반임에도 십 만원이 넘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90년대 명품 언더그라운드 가수 앨범으로 자리매김 되었기 때문. 꾸준한 입소문을 타고 2003년 그의 독집은 CD로 재 발매되었다. 술을 너무 좋아했던 그는 아쉽게도 2000년 즈음에 간경화로 세상을 등졌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