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사랑할 수 있을까여성의 남성결정권과 일부일처제의 싸움승자는

예술 활동은 위협적이며, 유혹적이다. 뛰어난 작품은 당대의 외면과 위대한 천재의 불행을 요구해왔다. 영화도 예외 없이 영화인의 좌절과 고통을 자양분으로 성장하는 나무다. 예술에 대한 글쓰기는 안전한 도피처이며 일종의 타협이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필자도 영화 만들기보다 영화에 관한 글에 발이 묶인 지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영화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약속을 했었던 것 같다. '별점은 부여하지 말자', '좋은 작품에 대해 평가하되 덜 좋은 작품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삼가자', '짧은 글보다 긴 글로 소통하자', '가방끈 긴 고급 독자의 구미에 맞는 글보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삶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기억에 남은 한 줄이 되도록 힘쓰자', '글은 상처보다는 치유, 억압보다는 해방에 일조하는 자음과 모음의 결합이어야 한다' 등등이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는 일은 단식원에서 나온 인간이 맛있는 제과점을 그냥 지나치는 것만큼 어렵다. 2007년 11월 6일 김동현의 <처음 만난 사람들>으로 '시네마 완전정복'(현 '시네마')의 영화평을 시작했다. 독립영화와 대중영화가 평등하게 관객들과 소통했으면 싶다는 소망에서 독립영화평으로 출발하였다. 한국독립영화가 충무로 대중영화의 상투성과 도덕적 해이를 견제하는 감시자이자 견제구이기를 바랐다.

l년이 넘는 투고 기간 동안 필자의 영화평에 대해 대부분은 묵묵부답이었지만, 세 번의 반응은 기억에 남는다. 한 번은 동창회조차 얼굴보기 힘든 중학교 동창생이 보낸 메일이다. 이름이 문희숙인 그 친구는 교직에 봉사하고 있다. 메일은 "이번 여름에 한 달이 조금 넘는 제법 긴 여행을 했지. 떠나기 전에 개봉을 안 해서 못보고 떠났는데, 돌아와보니 <님은 먼 곳에>가 거의 끝잔치더군. 인천공항 오르내리는 버스에서 영화잡지를 보니 영화평이 생각보다 안 좋더군. 영화관을 나오면서 난 무언지 모를 감정에 마음이 착잡했어. 갑자기 그대 생각이 났지. 고맙게도 그대가 쓴 그 영화의 평을 만날 수 있어 얼마나 '고맙고 행복했는지…'."이었다. 사소한 필자의 글로 누군가가 잠시 행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두 번째는 <아스라이>의 김삼력 감독이다. 그는 <아스라이>에 대한 평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항의 메일을 보내왔다. 그를 불편하게 했던 필자의 글은 "<아스라이>에 대한 평가나 작품에 대한 항변이 영화적 실패를 무마하려는 찬란한 수사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김삼력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공감하지 못하는 관객에게 "너희는 꿈이 없느냐?"라고 묻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필자는 꿈이 있다. 필자의 작은 꿈은 한국 독립영화 관객 개척과 독립영화 자생력 기르기라는 꿈이다"라는 대목이었다. 필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에게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김삼력은 다작의 감독이므로 타고난 창조적 에너지로 자신의 영화 행보를 계속해갈 것으로 믿었다. 지금,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세 번째는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남유미 학생이었다. 그녀는 방학 기간 동안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미주판에 실린 필자의 글을 읽고 반갑고 기뻐서 주변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다고 들떠서 말했다.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처럼 필자도 한 사람의 독자라도 존재한다면 붓을 놓지 않을 명분이 생긴 것 같아 행복했다. 언급한 세 분뿐만 아니라 부족한 졸문을 진지하게 읽어주신 모든 독자 분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이제 홍지영의 데뷔작 <키친>으로 영화평 쓰기를 마감하려 한다. 삼일로 창고극장 간판에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수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라는 표어가 붙어있다. 필자는 "영화가 인생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라는 말로 옮겨 적고 싶다.

홍지영의 <키친>은 1970년대에 카이두 클럽이라는 실험영화 모임을 이끌었던 한옥희 감독과 함께 시사회에서 관람했다. 한옥희 감독은 <다섯 개의 거울>이라는 작품을 화가 김점선과 작업했다. 찍는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보여주기 위해 촬영하는 김점선은 전라의 상태로 카메라를 들었으며 찍히는 한옥희 감독은 옷을 입고 찍는 퍼포먼스를 감행하면서 영화의 정신을 실천하려 했던 자생적 한국실험영화 감독이다.

<키친>은 프랑소와 트뤼포의 <줄 앤 짐>과 한국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또 다른 버전이다. 한 여성이 두 남성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공유하는 영화다. 모래(신민아)는 평생 한 남자 상인(김태우)만 알고 지내고 그와 결혼한다. 모래에게 상인은 이 세상의 모든 남자와 동의어다. 모래는 갤러리에 갔다가 우연히 한 남자와 비좁은 공간에 숨게 되고 거기서 우발적인 섹스를 하게 된다. 그 남자는 남편 상인의 요리 멘토인 두레(주지훈)이며 그는 모래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한 공간에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동거하면서 사랑의 감정이 성장하게 된다. 외국에서 성장한 두레에게 결혼한 여자라는 제도적 제약은 의미없다. 두레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다'는 명분으로 모래와 관계에 적극적이며 새로운 남성에 대한 매혹에 빠진 모래와 결국 사랑에 빠진다. 모래는 관습의 장애로 두레를 밀어내려 하지만 즉석사진을 찍는 곳에서 두 번째 섹스를 하면서 스스로 감정을 받아들이다. 결국 상인은 두레와 모래의 관계를 알게 되고 이혼을 감행하면서 모래에게 선택권을 준다. 여성의 남성 결정권과 일부일처제의 싸움에서 전자의 승리에 손을 들며 <키친>은 감정에 충실한다는 이름으로 설득한다.

신민아와 주지훈과 김태우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으며 미장센과 장면 연결은 군더더기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허전하다. 극장문을 나서면서 한옥희 감독은 "요즘 영화는 너무 키치적이야"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신인감독의 데뷔작에 신인의 전복성과 패기는 덜하고 잘 만들어진 충무로 영화에 더 다가간 것 같다. 지금 한국영화는 위기라고 한다. 한국영화사에서 위기의 시기는 호황기보다 늘 더 자주 찾아왔고 길었다. 현재 독립영화인과 충무로 영화인들은 배급과 제작비 가뭄에 위축되지 말고, 좋은 작품 기근에 목말라하는 관객의 목소리를 경청해주길 바란다. 관객의 낮은 목소리에 위기의 해답은 존재한다.



문학산 부산대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