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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방',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태정 감독
쪽방 벗어나고픈 젊은 여자와 넓은 공간 주체 못하는 중년 여인의 상반된 심리





김시무 영화평론가



우리나라 전문 영화인력 양성에 일정한 기여를 해온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서 몇 년 전 제작연구과정을 신설했는데, 지난 2008년 그 첫 결실인 1기 작품이 완성되어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백승빈 감독의 '장례식의 멤버 Members of The Funeral', 이숙경 감독의 '어떤 개인 날 The Day After', 고태정 감독의 '그녀들의 방 The Room Nearby' 그리고 애니메이션인 '제불찰씨 이야기 The Story of Mr. Sorry' 등이 바로 문제의 영화들이다.

이들 작품들은 저예산에다 실습작품(workshop)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러나 아마추어 수준은 훨씬 뛰어넘고 있다. 문제의식도 만만치 않다. 지면관계상 고태정 감독의 '그녀들의 방' 한 편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낮에는 학습지 교사로 일하고 밤에는 고시원 총무로 근무하며 쪽방을 얻어 쓰고 있는 구언주(정유미)와 부동산 개발회사 이사로 일하지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유석희(예수정)가 극의 핵심인물이다.

두 여자 곁에는 각각 한 남자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데, 언주의 고향친구 정은성(백수장)과 개발회사 직원 이재우(박혁권)가 그들이다. 언주의 소망은 단 한 가지다.

지긋지긋한 쪽방신세를 면하고 두 발 편하게 뻗고 잘 수 있는 널따란 방 한 칸을 마련하는 것이다. 끔찍한 가난 탓에 쪽방에서 온가족이 아등바등 살던 유년의 추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그래서 하루 온종일 발품을 팔며 고생을 해도, 직장상사로부터 모욕적인 구박을 당해도 묵묵히 일에만 몰두한다. 한편 석희의 소망은 넓디넓은 자신의 집에 함께 기거할 누군가를 찾는 것이다. 사랑하는 어린 딸을 사고로 잃고 남편마저 행방불명(?)인 그녀에게 유일한 낙은 가끔 찾아와 밥을 먹고 가는 부랑아뿐이다.

말하자면, '그녀들의 방'은 좁은 공간을 못견뎌하는 한 젊은 여자와 역으로 넓은 공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 중년 여자의 엇갈린 행보를 통해 삶의 의미, 나아가 행복의 의미를 되짚고 있는 성찰적 영화라고 하겠다.

이처럼 언뜻 단순해 보이는 줄거리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는 대단히 복잡하고 심층적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관심사는 그처럼 복잡다기한 심리적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는 두 명의 여배우한테 모아질 수밖에 없다.

고태정 감독은 연출의 변을 통해 "정유미와 예수정은 카메라에 담기는 것만으로도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배우들이다"라고 밝혔다. 필자가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지난해 치러진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다.

세계 각국에서 출품된 수백 편의 쟁쟁한 영화들이 상영목록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굳이 실습작품에 불과한 '그녀들의 방'을 선택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바로 정유미가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2004년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으로 첫 선을 보인 정유미는 이듬해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2005)를 통해 본격적으로 장편 극영화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영화 자체는 인기스타 김정은이 주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참패했지만, 그녀의 소녀시절을 연기한 새싹 정유미는 단연 빛을 발했다. 평단은 그녀의 등장에 환호했고, 만장일치로 영평상 신인상을 안겨주었다.

이후 정유미는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2006)에서 다시 한 번 그녀의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양모의 손에 자랐지만, 티 없이 맑고 명랑한 심성의 소유자인 채현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것이었다.

이 영화에는 고두심, 문소리, 공효진, 엄태웅, 봉태규 같은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을 했지만, 신인 정유미는 조금의 꿀림도 없었다. 오히려 얽히고설킨 가족관계에서 핵심적 매개 역할을 해내면서 작품 자체의 격조를 정상으로 끌어올린 견인차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 정유미가 맡은 채현은 주변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아주 오지랖 넓은 캐릭터였는데, 이는 '그녀들의 방'에서의 언주와는 전혀 상반되는 캐릭터였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좁디좁은 공간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언주는 욕구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데다 꼬이기까지 한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다. 말하자면, 정유미는 사람들을 끌어안는 캐릭터(채현)에서 이번에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캐릭터(언주)로 일대 변신을 한 것이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여전히 동일한 개성을 보지(保持)하고 있는 정유미의 표정에서 전혀 이질적인 캐릭터가 동시에 탄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눈빛 하나만 살짝 바꾸었을 뿐인데, 천사(天使)였던 그녀는 어느새 악녀(惡女)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보통은 연기 변신이라 하면, 외적인 표정과 말투에서 다소 과장되고 인위적인 '오버' 연기로 빠지기 십상인데, 정유미의 경우 그러한 변화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역할만 바뀌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내면의 변화를 통해 극단의 캐릭터를 오간다는 점에서 정유미야말로 내면연기의 한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지나친 과찬(過讚)이라고?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 영화를 두 번 씩이나 보았고, 그 결과 이 같은 글을 쓰고 있음이다.

'그녀들의 방'에서 한쪽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중견여배우 예수정도 주목할 만하다. 알다시피 그녀는 '바다와 양산'(2004/2007), '그린 벤치'(2006), '신의 아그네스'(2007), '잘자요 엄마'(2008) 같은 연극에서 지적이면서 섬세한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2007년에 제작된 '기담' '황진이' '궁녀' 등등의 영화에도 월경하여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러한 탄탄한 연기경력이 '그녀들의 방'에서 한 결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특히 평상시엔 부드러운 듯하다가도 갑자기 히스테리적인 광기를 부리는 대목은 섬뜩할 정도다.

그런데 결론을 말하자면 이 영화는 보는 관객을 다소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는 우선 무엇보다도 캐릭터들이 비호감형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데서 기인함은 물론이다.

이 영화는 사람살이가 비록 고달프고 척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살 만하다는 희망이 섞인 주장을 하지 않는다. 요컨대 따뜻한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이른바 '착한영화'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관객 동원 800만 명을 넘어선 '과속스캔들'과 독립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워낭소리' 같은 영화들이 바로 그러한 부류이다.

일종의 소재주의의 승리라고 할까? 한꺼번에 개봉될 상기 네 편의 작품들도 하나같이 '착한 영화'들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이처럼 다소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들에 관객들이 관심을 가질 때야 비로소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논의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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