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표면은 일탈적 사랑, 내면은 개인적 실존에 대한 탐구의식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vid Daldry) 감독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는 10대 소년과 30대 여성간의 매우 유별난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이런 특별한 이야기가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본 직후 영화와 현실 간의 간극(間隙)이 그리 깊지 않다는 것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다. 현실 같은 영화가 있는가 하면, 영화 같은 현실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한 일간지에서 읽었던 기사 내용이 생각난다. 1995년에 초등학교 2학년 남학생과 성관계를 맺었다가 구속된 한 여교사(메리 케이 르투어노)의 이야기였다.

당시 33살이었던 르투어노는 12살의 제자 푸알라우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는데, 그 제자가 보낸 연서(戀書)를 본 남편이 고발하는 바람에 아동강간죄로 체포되어 7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구속 당시 푸알라우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고 한다. 구속 6개월 후 가석방되었으나 제자와의 접촉 금지명령을 어긴 탓에 결국 7년 형기를 모두 채우고 마침내 출소를 했다.

두 사람은 은밀히 교제를 해오다가 지난 2005년 결혼식을 올렸다. 그 제자는 그때 22살의 어엿한 청년이 되었고, 두 사람 슬하에는 두 자녀가 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역시 30대 여인과 10대 소년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한국영화 한편이 개봉되기도 했다. 박철수 감독이 만든 <녹색의자>가 바로 문제의 영화다.

이 영화 역시 한때 국내 언론을 자극했던 고등학생과 성관계를 맺었던 유부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32세의 여자와 19세의 법적 미성년자와의 만남이 '역 원조교제'라는 이름으로 단죄된 사건이었다.

영화는 10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받고 가석방된 김문희(서정)가 다시 현(심지호)과 만나서 새롭게 열정을 불태운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언뜻 선정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담담한 시선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탐색해간다.

요점은 이렇다.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성적 욕망에 굶주린 유부녀와 성적 호기심에 불타는 청소년의 일탈 행위인가, 아니면 상기 미국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나이 차와 신분의 장벽을 뛰어 넘은 사랑의 승리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나는 이 같은 일련의 운명적 사랑 이야기를 접하면서 조만간 할리우드판 <녹색의자>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르투어노와 푸알라우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할리우드가 간과할리 없으니까. 나의 예측은 절반만 적중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더 리더>가 바로 그런 소재를 다루고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열병으로 인해 구토를 해대는 한 10대 소년을 발견한 30대 여성이 그를 간호하여 돌려보냄으로써 운명적 사랑이 시작된다.

며칠 후 완쾌된 마이클은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한나(케이트 윈슬렛)를 찾아가지만, 실은 어떤 미묘한 힘이 그를 그녀 곁으로 이끌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날로 두 사람은 격정적인 애정관계로 빠져들고, 마이클은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한나의 집을 찾는다.

물론 두 사람의 만남이 성적 탐닉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한나는 마이클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고, 두 사람은 성관계를 갖기 전후 책읽기를 무슨 의식처럼 행하게 되었다. 한나는 마이클이 읽어주는『오디세이』를 들으면서 무척이나 재미있어 하지만,『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들으면서는 야하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그렇게 꿈같은 시간들이 흘러가고, 어느 날 한나는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8년이란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간다.

그 사이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세미나의 일환으로 참관한 재판현장에서 한나를 발견하게 된다. 피고인 신분인 한나의 죄목은 나치집권 시절 간수로 근무하던 중 유태인 대량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나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무고(無辜)를 주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무산시켜버리고 만다.

필적 감정을 위한 자필 서류 제출을 거부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이클이었다.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마이클은 이제야 비로소 그녀가 보인 행동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영화 <더 리더>가 앞의 두 예와 갈라서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표면상 소년과 여성의 일탈적 사랑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마멸되고 있는 개인적 실존(實存)에 대한 탐구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극중 여주인공 한나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죄로 법정에 섰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유태인 피해자 문제를 새삼스럽게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의 만행에 대한 독일인의 참회와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알다시피 나치에 동조한 독일인들은 총통의 명령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감금하고 고문하고 나아가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 집단적 광기의 최대의 희생자는 물론 유태인이었다.

그러나 총통이 죽고 전쟁이 끝이 나자 독일인들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히틀러의 악몽을 말끔하게 씻어버리고 다시 일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어라고 경제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50-60년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한나는 바로 그러한 독일적인 시대적 상황 속에 던져진 한 인간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범죄행각을 추궁하는 판사의 질문에 자신은 그저 주어진 간수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답한다.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뿐"이라는 것. 결국 그녀에게 유죄가 선고되지만, 그것은 그녀가 저지른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자존심 탓이었음이 후에 밝혀지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전체주의 독일은 결코 단죄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실존적 삶을 살았던 몇몇 개인들이 희생양이 되었을 따름이다. 한나가 바로 그 같은 문제적 개인을 대변하는 인물임은 물론이다.

원작자인 베른하르트 슐링크도 바로 그 같은 역사인식에 기대어 소설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더 리더>는 바로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시무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