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미술이야기] 영화 '바스키아'와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낙서 화가로 명성·'흑인 피카소' 28년 짧은 삶·예술 동료화가가 영화화

미술은 언어다. 하지만 너무나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까닭에 우리는 그들의 언어의 독해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미술작품이 지닌 뜻을 헤아리고 그 작품을 통해 영화를 이끌어 가는 계기로 삼거나 영화의 반전을 암시하는 장치로 사용해 왔다. 이렇게 영화 속의 미술은 영화의 또다른 은유나 비유로 활용되면서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 왔다. 영화 속의 미술이야기를 통해 영화와 미술의 통섭의 세계를 만났으면 한다.

1-188억 원에 팔린 바스키아의 '무제'(1982-83)
2-영화 '바스키아' 포스터
3-바스키아 '자화상' (1982)

8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용어가 문화계의 주어가 되었던 시절 혜성처럼 나타났다 순간 사라지고만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1960~88)는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그리고 많이 팔리는 작가로 2008년 말 크리스티 경매에서 1982년작 '무제'(Untitled, 193×239㎝)가 1352만2500달러(188억원)에 팔리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1961~ )가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되었지만 바스키아는 이미 1980년 말에 세계 미술계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80년대 미국미술의 대표적 흐름인 신구상회화, 신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 그리고 낙서화가(Graffiti)로 명성을 얻었다.

중남미에서 이민 온 흑인 가정에서 태어난 바스키아는 18세부터 집을 떠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화가의 길을 걷고자 했다.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미술관을 찾은 그는 피카소의 '게르니카'(349×775cm, 유화, 1937년, 레이나 소피아 현대미술관, 마드리드 : 전에는 뉴욕의 MOMA에 위탁되어 있다 1981년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고국인 스페인에 반환되었다.)를 보고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이는 어머니를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영재들을 위한 시티애즈스쿨(City-as -School)에서 친구들과 낙서그룹 SAMO(Same Old Shit)를 만들어 스프레이로 뉴욕 전역을 낙서로 도배하고 뉴욕현대미술관(MOMA) 앞에서 그림을 그린 티셔츠나 엽서를 팔며 작가의 꿈을 키워나간다.

스무살이 되던 1980년'타임스 스퀘어쇼'(Times Square Show)에 참여 후 뉴욕의 PS1의 '뉴욕 뉴 웨이브전, 카셀 도큐멘타7'(Kassel Dokumenta)에 최연소 작가로 참가하고 1983년에는 휘트니비엔날레, 1984년 뉴욕현대미술관 전시에 참여하는 등 말 그대로 미술계에 '혜성'처럼 나타난다.

지하철역과 거리의 낙서로 '공공의 적'이었던 그는 어렸을적 교통사고로 비장을 들어내야 했던 시절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그레이의 해부학'책에서 영감을 얻어 전통적인 미술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내키는 대로 닥치는 대로 그려낸다.

그는 자신의 우상이자 흑인들의 우상이었던 재즈뮤지션 찰리 파커, 야구선수 행크 아론 등 미국 사회의 흑인 영웅들을 왕관을 씌운 모습으로 그려냈다. 거칠고 강렬하게, 때론 천진하고 심각하게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현실과 기존의 가치에 감자를 먹이기도 한다.

여기에 콜라주 기법을 통해 바탕을 만들고 전형적인 캔버스대신 얼기설기 엮은 캔버스에 스프레이나 안료들을 사용해서 하잘 것 없는 재료와 테크닉을 사용해서 기존예술의 가치를 일상으로 또는 뒷골목으로 끌어들이면서 미술계의 신동으로, 신인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중견작가로 발탁된다.

1-바스키아 '무제' / 2-영화 '바스키아'의 한장면
3-바스키아 '인물' / 4-바스키아의 모습 / 5-바스키아 '무제'(1981)

그의 성공은 '사람'을 알아보는 그의 주변사람들이 있어 가능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밀로는 실존 인물이 아니지만 앤디 워홀과 스위스에 자기 이름을 딴 화랑을 경영하고 있는 현대미술계의 큰 손 브루노 비숍벨거(Bruno Bischofberger, 1940~ ), 그리고 바스키아의 작품을 보고 그의 천부적 재질을 한눈에 알아차린 미술평론가 르네(Rene Ricard,1946~ ) 등이 그들이다.

르네는 타임스퀘어 전시에서 그를 처음 만나 후견인이 될 것을 자청하고 나서 그를 스타로 키워낸다. 그 후 브르노를 만난 그의 화랑에 전속작가가 되어 당대의 쟁쟁한 예술가들과 교유하면서 성공한 예술가들의 대열에 동참한다. 그의 이러한 성공의 바탕은 그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탓에 흐르는 감정에 따라 몸을 맡기는 힙합 리듬 같은 자유로움에 있다.

28년이라는 짧은 생, 코카인 중독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은 그의 삶과 예술은 그의 친구이자 동료화가였던 줄리앙 슈나벨에 의해 영화로 그려지면서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와 작가에 대한 신비화, 미술시장의 속성과 화상들의 인기 작가를 만들기 위한 작전 등등을 소상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바스키아는 물론 줄리앙 슈나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구상회화의 선두주자로 '깨진 접시'그림으로 포스트 모던회화의 선두인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영화감독으로도 성공한 재주 많은 사람이다.

바스키아를 선택해서 처음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어린나이에 분에 넘치는 자리에 올라 오랜 친구들과 헤어지고 매스컴과 화상들에게 이리저리 치여 섬세한 감성이 멍들기 시작하면서 외로움을 타는 성공의 이면과 문화계의 위선과 방탕 속에서 번민하고 방황했던 바스키아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고독한 천재' 바스키아를 그려낼 수 있었다.

성공이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이 영화에서 그는 화가로서 자질을 살려 영화에 나오는 모든 바스키아의 그림을 직접 제작해서 영화촬영에 동원했다.

또 장면 장면사이에 푸른 색채를 가미해서 영상미를 더하는 동시에 배경이 되는 그림을 통해 녹색의 강렬한 회화적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바스키아의 성공 뒤의 허탈함으로 우울한 블루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 앤디 와홀로 분한 가수 데이빗 보위(David Robert Hayward Jones, 1947~ )의 연기는 압권이다. 지금까지 앤디 워홀을 연기한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앤디를 재현했다는 평가이다.

여기에 쥴리앙 슈나벨의 문화예술계의 파워로 인해 많은 유명배우와 인사들을 등장시킨다. 아무튼 이 영화를 통해 1996년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된 후 '비포 나잇 폴스'(Before night falls, 2000)에 이어 갑자기 전신마비가 와서 신체 속에 갇혀버린 잡지 엘르 편집장 쟝 도미니크 보비의 투병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잠수종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 2007)로 칸영화제 감독상, 전미비평가협회 외국어 영화상, 골든글로브 감독상 등을 수상하는 한편 2008년 제6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화가로서도 성공했지만 영화인으로도 확실하게 위치를 점한다.

그리고 '루 리드의 베를린'(Lou Reed's Berlin, 2007) 같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서 예술가들의 삶과 인생의 이면과 고뇌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화가로 영화감독으로 살고 있다.



글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