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족사의 아픔을 간직한 무대포 남녀의 운명적인 만남

‘워낭소리’이후 저예산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요즘 또 한 편의 독립영화가 일반관객에게 선을 보일 채비를 하고 있다. 독립영화계의 스타라 불리는 양익준 감독이 주연과 연출을 도맡은 ‘똥파리’가 그것이다. 제작비는 1억 원 남짓 들었다고 한다.

웬만한 상업영화 한 편 만드는 데는 30~40억 원 정도 든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면서 일부 마니아 층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최근 해외 영화제에서 잇달아 수상을 함으로써 국내 개봉에 유리한 발판을 마련했다.

지난 3월15일 폐막한 프랑스 도빌 아시아영화제에서 대상과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Fipresci Award)을 수상했고, 하루 전인 14일에는 스페인 라스팔마스국제영화제에서 양익준과 김꽃비가 각각 남녀주연상을 수상했다. 2월에 열린 제38회 스위스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는 타이거상을 거머쥐었다.

비록 메이저급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국제적 지명도를 확보하고 있는 중간 규모의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독립영화가 연거푸 수상을 했다는 점은 일단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정도 내용의 영화에 이토록 국제적 이목이 쏠린다는 점을 납득하기 어렵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보았다.

2008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제출된 이 영화를 DVD로 처음 접했을 때 “또 깡패영화야”하면서 별로 대단하게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채점한 리스트에서 ‘똥파리’는 제외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두 심사위원들이 강력히 추천하는 바람에 상위 열댓 편을 지원하는 공모에 포함이 됐다.

10월에 열린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영화는 대형 스크린에서 봐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나름의 소신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남들이 다 좋다고 추천하는 영화를 왜 시큰둥하게 보았는지 다시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당시만해도 양익준 감독의 존재가 소수의 마니아 층에게만 알려진 터라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호응도는 높은 편이었다.

영화에 흐르는 정조(情調)는 초반부터 무척이나 파워풀했다. 먼저 물불을 안 가리는 안하무인의 캐릭터들의 등장이 눈길을 끌었다. 대화는 대개 욕설로 채워졌고 몸서리쳐지는 폭력 장면들이 영화 내내 시선을 붙들었다. 의리라고는 도통 찾아볼 수 없는 냉혹한 똥파리들의 세계는 파국적 결말을 향해 갔다.

결국 주인공의 참담한 죽음으로 폭력의 한 시기가 마감된다. 예견된 죽음이었다. 장르 법칙에 따른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래서 찡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독립영화 ‘똥파리’에는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틀림없이 있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똥파리’의 메인 캐릭터인 상훈(양익준)의 행적을 따라가보자.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밀어버린 상훈은 그 생김새만으로도 성격이 설명될 만큼 전형적인 캐릭터이다.

그는 인간관계에서의 위아래 개념이 없다.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고, 심지어 누나한테도 함부로 대한다. 아버지를 예사로 두들겨 팬다. 욕설로 대화하고 폭력으로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괴물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 그가 어느날 임자를 제대로 만난다. 우연히 동네 골목길에서 시비가 붙은 여고생 연희(김꽃비)다.

연희는 남녀 차별 없이(?) 주먹부터 나가는 상훈한테 된통 얻어맞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욕설로 맞짱을 뜬다. 시쳇말로 겁대가리 상실한 무대포 남녀 캐릭터들의 운명적인 만남이랄까? 그런데 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가족사의 아픔과 한을 온몸으로 껴안고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쪽은 남들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가학적(sadism)으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다면, 다른 한쪽은 남들한테 얻어맞고 살면서 피학적(masochism)으로 하루하루를 영위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두 주인공이 이처럼 무모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능한 아버지다. 상훈의 아버지는 부부싸움 와중에 딸을 흉기로 찔러 죽게 했고, 월남에 파병되었던 연희의 아버지는 극심한 의처증으로 폐인이 된지 오래다. 내가 문제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고개 숙인 아버지 모티브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 끌리면서도 거부감 또한 들었던 이유는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가부장제로의 회귀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똥파리’에서 가정이 결딴난 것은 순전히 아버지 잘못 만난 탓이다. 좋은 아버지를 만났더라면, 현실은 좀 더 안온했을 터인데 하는 무의식이 깔려 있다.

상훈의 빗나간 행동들은 오이디푸스 궤적(Oedipal trajectory) 으로부터의 일탈이었고, 영화의 내러티브는 그 정상적 궤도의 회복을 꾀하고 있다. 그래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더 있다. 캐릭터의 상투성이다. 유아독존적이고 안하무인인 캐릭터의 전형은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처음 ‘똥파리’를 접했을 때 ‘나쁜 남자’의 독립영화 버전처럼 느껴졌다..

악행을 일삼던 메인 캐릭터가 개과천선(改過遷善)하려니까 인과응보로 죽임을 당한다는 결말도 전형적이다. 이미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규칙’에서 그 선례를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우리로서는 ‘똥파리’에 변주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기가 힘들다.

‘똥파리’는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외관을 띠고 있지만, 캐릭터 설정과 내러티브 전개는 기존 장르영화의 그것을 착실하게 따르고 있다. 저예산 장르영화라고 할까? 흥행의 최적 조건마저 갖춘 ‘똥파리’가 어떤 실적을 낼지 궁금해진다.



김시무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