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명반·명곡] 배호 '돌아가는 삼각지' 1967년 아세아 AL 123국내 지명을 세계적 도시로 착각들게 해신장염으로 생사의 갈림길서 들려준 처절한 절규… 5개월간 정상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중에겐 ‘우리 것’은 모두 촌스럽게 생각하는 서구지향적인 취향이 분명 있었다. 때문에 지역을 상징하는 특별한 목적이 있는 노래가 아니라면 국내의 지명은 노래 제목이나 가사에서 피하고 싶은 대상이자 소재였다. 전통적으로 트로트 장르는 이 부문에선 예외적이다.

장구한 세월동안 평범한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대변하며 적극적으로 주요 소재로 다뤄왔기 때문이다. 적어도 민족적 장르인 트로트에서 ‘구수함’ 혹은 ‘촌스러움’은 대중적 친근감을 유지시키는 장르적 미덕으로 힘을 발휘했다. 물론 트로트의 현대화 물결을 타고 그 같은 장르적 미덕이 이제는 많이 희석되었지만 말이다.

여성트로트가수의 상징인 이미자나 하춘화의 노래에 전국 각지의 지명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서울의 구체적 지명이 자주 등장하는 배호의 노래도 예외는 아니다. 배호의 대표곡에는 ‘삼각지’, ‘장충단 공원’ ,‘명동거리’등 서울의 구체적 지명이 제법 등장한다. 하지만 대중은 그의 노래를 촌스럽기보단 세련된 것으로 생각했다.

형식은 트로트지만 세련된 무대매너와 폭발적인 재즈풍의 창법은 ‘촌스러울(?)’ 국내의 지명을 마치 세계적인 어느 도시로 착각시키는 마력을 발휘했기 때문. 그래서 애간장을 태우듯 토해내는 배호의 노래는 당대 여성들의 애간장을 녹였고 사내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악보조차 읽지 못한 그가 정상의 가수에 오른 것은 기적 같았다. 신장염으로 인해 생사의 갈림길에서 들려준 그의 노래는 처절한 몸부림이자 절규였다. 1966년 영화 주제가 ‘황금의 눈’은 처음으로 가요차트에 진입해 대중에게 그의 존재를 알린 신호탄이다.

하지만 이후 매일같이 밤을 새우는 무리한 음악활동으로 몸은 퉁퉁 부어올랐고 병원신세를 지는 일이 점점 늘어갔다. 대표 곡인 ‘돌아가는 삼각지’는 1963년에 이미 작곡된 곡이다. 당시 삼각지는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진 입체교차로가 생기나기도 전이다. 그땐 전차가 다녔고 분수대도 있었다.

작곡가인 배상태는 노량진에서 전차를 타고 충무로까지 출퇴근하면서 ‘삼각지’라는 지명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이별의 아픔을 겪은 한 사내가 홀로되어 쓸쓸하게 돌아가는 모습이 떠올라 만들어본 노래라고 한다.

이 국민가요급 노래가 3년 동안이나 노래를 부를 가수가 없어 임자 없는 나룻배 신세였다면 믿겠는가!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남일해는 이 노래의 임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그는 연습만 몇 번 했을 뿐이다. 인기가수 금호동도 '이런 구닥다리 노래를 왜 부르느냐'며 노골적으로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자존심이 상한 작곡가는 내심 잘나가던 신인가수 남진이 취입하길 바랐지만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결국 아세아레코드의 전속 무명가수 김호성이 처음으로 녹음을 했지만 음반으로 제작되지는 못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작곡가 배상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을지로 천지카바레에서 신나게 드럼을 치며 노래 부르던 배호가 생각났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그는 청량리 인근의 허름한 배호의 전셋집으로 찾아가 악보를 건넸다. 건강 때문에 거동조차 힘들었던 배호 역시 처음 노래취입을 사양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쓸쓸한 분위기의 노래가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 가래를 뱉어가며 취입을 강행했다. 불멸의 명곡 ‘돌아가는 삼각지’는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세상 빛을 보았다. 1967년 2월에 발표된 ‘돌아가는 삼각지’는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9명이 되는 가수의 총 12곡이 수록된 노래 중 배호의 노래는 3곡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오리지널 버전 ‘돌아가는 삼각지’를 들어보면 박자가 일부 끊겨 있고 목소리 역시 병색이 완연하다. 그 때문에 대중은 '병자의 노래, 깡패소리 같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병상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배호의 노래는 4개월 후 KBS 대구방송 가요차트 8위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반응을 몰고 오기 시작했다. 이후 장장 5개월 동안 정상을 석권하는 놀라운 기적을 창출했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