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전수일 감독의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탈 프레임 화면구성 등 공간의 깊이와 현실감 최고조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더 잘 알려진 감독이 있다. 전수일 감독이 바로 그 당사자이다. 아니 데뷔를 한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국내 저널리즘 및 평단으로부터 외면을 당해 왔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것이다. 국내 저널에서는 역시 해외에서 더 유명한 김기덕, 홍상수 감독 등등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지면을 할애했으면서도 웬일인지 전수일 감독한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김기덕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한편이 제작될 때마다 특집으로 도배를 하던 국내 저널들이었지만, 전수일 감독의 영화에 대해서는 단신 보도 이상을 하지 않았다. 전수일 감독이 작품성에서나 흥행성에서 이렇다 할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해서였을까? 그 동안 줄 곳 독립제작을 고수해온 전수일 감독에게서 상업성을 담보로 한 흥행작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작품성이 문제가 될 터인데, 사실 그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평자들이 없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전수일 감독은 1998년 ‘내 안에 우는 바람’으로 데뷔를 한 이후 이듬해 1999년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를 잇달아 연출했다. 그러나 이들 초기의 작품들은 지나치게 자의식적이고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저널리즘의 관심사로부터 멀어졌다. 그 후 한동안 휴지기를 갖던 전수일 감독은 2003년 김영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계기로 대중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 전 감독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2005)이라는 일종의 로드무비로 지역성(locality)에 기반을 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공고히 했다. 참고로 속초에서 출생한 감독은 현재 부산에 살면서 주류 영화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독립적으로 영화제작을 해오고 있다.

이처럼 전수일 감독은 지난 10년 동안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집요하게 탐구해왔지만, 일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평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수일 감독은 역시 저력이 있었다. ‘검은 땅의 소녀와’(2008)라는 작품으로 그를 멀리하던 평자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은 것이다. 탄광에서 일하던 한 광부가 직업병(진폐증) 판정을 받게 되자 회사에서 쫓겨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충격적이게도 어린 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었다.

절제된 카메라의 시선으로 마치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담아낸 탄광촌의 비극(悲劇)은 나를 비롯한 많은 평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의 차기작에 대한 관심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부응하려는 듯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것이 바로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 Himalaya, Where the Wind Dwells(이하 ‘히말라야’)’(2008)이라는 매우 시적인 제목의 영화다.

어떤 영화인가? 회사에서 밀려난 40대의 남자가 우연한 기회에 전혀 계획에 없던 히말라야 여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 모티브다. 불혹의 기러기 아빠 최(최민식)가 동생이 운영하는 조그만 공장에 들렀다가 네팔 출신의 한 이주노동자(극중 도르지)의 장례식을 접하게 되고 얼떨결에 그의 유골을 고향에 전달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떠맡게 된다.

대기발령 상태라 마땅히 할 일도 없었던 최(Choi)로서는 아예 이참에 바람이나 쐬면서 대책을 강구하자는 생각을 했으리라. 도르지의 유골함을 여행 가방에 담은 최는 그러나 그 여정이 고행 길이었음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산병에 걸리는 최악의 악조건 속에서 마침내 히말라야 설산 아래 위치한 도르지의 고향에 도착한 최는 막상 그의 부음(訃音)을 전하지 못한다.

도르지의 안부부터 묻는 가족들의 천진한 눈망울 탓이었다.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면서 낯선 환경에 적응해가던 최는 자신이 이곳에 온 애당초 목적조차 망각할 지경이다. 그렇게 최가 도르지의 아들과 사귀고, 마을 노인네들과 사귀고, 급기야 도르지의 아내하고도 미묘한 관계로 빠져들 즈음 도르지의 유골함이 발각(?)되어 그의 미션이 마무리된다는 것이 영화의 얼개다.

감독에 따르면 2-30여 쪽에 불과한 시나리오를 토대로 하여 ‘히말라야’를 완성했다고 한다. 사실 그 정도의 분량이면 단편영화의 수준으로도 모자랄 내용이었지만, 감독은 그 공백을 그 어느 영화보다도 진중한 공간감과 깊이감으로 채워 넣는데 성공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 영화만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내러티브 중심의 영화를 볼 때 관객들은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채 작품의 이야기 구조를 따라가도록 되어 있는데, ‘히말라야’는 그와는 달리 관객이 주인공과 더불어 여행길에 동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이 영화가 선형적 내러티브(linear narrative)보다는 탈프레임 화면구성(an extension of a frame)에 더 치중을 했기 때문에 생긴 자연스런 귀결이라 하겠다.

요컨대 감독은 인물 중심으로 화면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바깥으로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주변 환경까지 아우르는 화면구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히말라야의 장엄한 풍광 자체가 스펙터클 차원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황량한 산꼭대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일하며 사랑하며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 그리하여 최가 셀파를 따라서 가파르고 험준한 자갈투성이의 산길을 헉헉대며 올라갈 때 관객도 마치 그 길을 함께 따라나선 현존재가 된다. 또한 최가 수십 수백 미터 낭떠러지가 내려다보이는 집 앞마당에서 히말라야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을 쐬고 있을 때 관객도 역시 그 옆에 선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독립제작 영화답지 않게 35mm 카메라로 찍어서 공간의 깊이감과 현실감을 더했기 때문에 가능한 흔치 않은 영화적 체험이라 하겠다. 소품이니까 DVD로 봐도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제목처럼 히말라야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묘미를 제대로 만끽하려면 널따란 스크린 앞에 앉아야 제격이다.

그런데 왜 히말라야가 바람이 머무는 곳인가? 흔들리는 마음의 동요(動搖)를 가장 잘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이 휘몰아치는 바람이 아니던가? 바람의 진원지인 히말라야가 다름 아닌 바람의 쉼터(머무는 곳)가 아니겠는가? 히말라야는 바람의 모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김시무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