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톰 칼린 감독의 '세비지 그레이스'이율배반의 극한에서 처참하게 망가지는 인간들

반짝이는 크리스털 글라스와 은식기가 보석처럼 빛나는 식탁 앞에 앉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의 날것에 가까운 고기를 씹어 삼키며 우아하게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고상한가? 아니면 야만적인가?

제 아무리 세상에 둘도 없을 고상한 존재인 양 굴어도 본질은 죽은 동물의 살덩이를 필요로 하는 야만성에 있다. ‘야만적인 고상함’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 톰 칼린 감독의 <세비지 그레이스>는 이런 이율배반의 극한에서 허우적대다가 처참하게 망가지는 인간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한 청년의 나른하고 모호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난 물과 불이 만나 생긴 결과였다”는 토니(에디 레드메인)의 말처럼, 그는 절대 섞일 수 없는 성질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플라스틱을 발명한 조부 덕에 미국 최상류층의 삶을 누리는 아버지 브룩스(스티븐 딜레인)와 배우가 꿈이었던 아름다운 어머니 바바라(줄리안 무어)는 완벽한 위선으로 삶을 지탱한다.

최상류층 베이클랜드 가의 여주인 바바라는 일국의 왕자를 저녁식사에 초대할 만큼 사교계의 거물이 됐지만, ‘돈에 팔려온 붉은 머리 창녀’라는 수근거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편 엄청난 가문의 상속자로 태어난 브룩스는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는 삶이 선물한 무료함과 공허에 시달린다. 브룩스의 유일한 ‘일’은 젊은 여자의 육체를 찾아 떠도는 것 뿐이다.

넘쳐나는 부를 가눌 길이 없어, 베이클랜드 부부가 뉴욕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유랑을 다니는 사이에 어린 토니는 청년이 된다. 툭하면 사라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유일신처럼 자신만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히스테리를 다독이며.

이들의 ‘야만’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건, 이 때부터다. 아버지는 아들의 첫 사랑을 빼앗아 달아나 아예 딴 살림을 차리고, 어머니와 아들이 한 남자를 가운데 두고 정사를 나누며, 어머니와 아들의 근친상간이 벌어진다. 만약 이 영화가 무료한 부르주아지 가족의 끝없는 타락을 ‘상상’한 결과였다면, 감독의 ‘끔찍한 상상력’에 혀를 차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베이클랜드 가의 비극은 실화다. 이 엄청난 비밀이 세상에 드러난 건, 1972년 11월 17일 런던 의 고급 주택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부엌칼로 어머니를 찔러 죽인 아들은 구급차를 불러놓고, 느긋하게 중국음식을 주문하고 있었다. 토니의 패륜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년 시절부터 토니를 아들이 아닌 남편처럼 사랑했던 어머니와 아들에게조차 수컷의 우위를 과시하려 했던 아버지가 있었다.

영화 <세비지 그레이스>는 20세기 미국 최상류층의 간판스타였던 베이클랜드 가문에서 흘러나온 추문의 100년사를 정리한 책 <세비지 그레이스: 부유하고 유명한 한 미국 가족의 치명적 관계에 관한 실화>에 젖줄을 대고 있다.

톰 칼린 감독이 그들을 스크린 속으로 초청한 이유는 한 장의 흑백사진 때문이었다. “11살의 토니가 욕조에서 나체로 있는 사진이 있다. 대단히 매력적인 사진이지만, 그 사진을 엄마가 찍었다는 걸 상기하곤 이내 냉정해졌다. 정상적인 11살 아이는 욕조 안에서 결코 이런 자세로 엄마 앞에서 자세를 취할 수 없다.

그 사진 속에서 느껴지는 모자의 놀라운 관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확실히 <세비지 그레이스>의 모자 관계는 놀랍다. 소년 시절부터 어머니의 남편 행세를 해야만 했던 아들, 그 아들을 사랑하다 못해 그의 육체마저 원하는 어머니. 하지만 기이하게도, 바바라와 토니가 상상 그 이상의 패륜을 벌이는 두 번의 충격적인 장면을 보며 누구에게 죄를 물어야 할 지 난감해진다.

15년 전, 톰 칼린 감독은 장편데뷔작 <졸도>에서 완전범죄의 희열을 느끼기 위해 무고한 소년을 살해한 부르주아지 게이 연인의 실화를 그리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갖게 했다. 아마도 종잇장처럼 얇은 보호막으로 용솟음치는 야만의 광기를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자멸하는 인간을 향한 연민어린 시선 때문이리라.

또 다른 기이함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화면이다. 광기와 야만이 가득한 <세비지 그레이스>에선 질척하고 음습한 기운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광기는 음습한 습지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종류가 아니다. 휴양지에서 손에 쥔 바싹 마른 모래가 하릴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모든 것 갖고 있는 듯 보이지만 아무 것도 갖지 못하는 공허의 반복에서 잉태된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썩어가는 인물들의 내면을 화면 위로 끄집어내는 대신, 부서지는 햇살 아래 화려한 옷을 차려 입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포착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충격적인 패륜이 자행되는 순간마저도 그들의 얼굴 위에서 빛이 부서진다. 감독은 화면과 이야기의 이율배반을 통해 끔찍하게 아름다운 지옥도를 완성한다.

톰 칼린 감독의 지옥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배우들의 매력엔 누구나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 수 있을 것이다. 토니를 연기한 에드 레드메인은 나른하고 유약한 퇴폐미로 스크린을 녹이고, 백만장자 브룩스 역의 스티븐 딜레인은 열정과 온기가 사라진 인간의 건조함을 훌륭히 표현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지옥도의 중심엔 줄리안 무어가 있다.

불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머리와 셀로판지처럼 투명한 흰 피부의 바바라가 문득 스크린 너머를 바라볼 때, 잠시 진공상태 같은 갑갑함이 엄습한다. 바바라의 그려 넣은 것 같은 입가의 미소와 상념이 소용돌이치는 눈동자를 한 얼굴에 담은 줄리안 무어는, 말없이 그녀의 부서진 영혼을 보여준다. 줄리안 무어 만으로도 ‘세비지 그레이스’는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