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셰인 메도우즈 감독의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 바탕 애정과 반성 담아 영국의 80년대 회고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한강의 기적, 광주, 대학가의 최루탄 냄새, 롤라장. ‘대한민국의 80년대’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영국의 80년대는 어떨까? 1972년 생의 젊은 영국 감독 셰인 메도우즈는 이렇게 정리한다.

갤러그 게임과 닥터 마틴, 대처 총리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그리고 포클랜드 전쟁과 스킨헤드. 메도우즈 감독은 ‘이것이 영국이다’라는 단호하고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에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국의 80년대를 재기발랄하게 회고한다.

<디스 이즈 잉글랜드>는 80년대 영국의 시대상을 한 눈에 정리해주는 자료화면으로 시작한다. 이 속성 교육 덕분에 우리는 영국 소도시에서 엄마와 단둘이 사는 아홉 살 소년 숀(토마스 터구스)의 처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가 최초의 여성 총리로 당선된 1979년의 영국은 국가적 경제위기에 휘청대던 시기였다.

“위대한 대영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하여”라는 구호아래 ‘철의 여인’은 변화의 칼을 뽑아들었고, 영국 사회엔 격변의 회오리가 불어 닥쳤다. 사회의 회오리는 아홉 살 소년 숀의 인생에도 할퀴고 간 상처를 남긴다. 포클랜드 전투에서 사랑하는 아빠를 잃은 숀은 제 또래 소년들보다 한참 일찍 사춘기를 겪기 시작한다.

사춘기 숀에게 세상은 맘에 안 드는 것들 투성이다. 히피 출신의 엄마가 입혀주는 ‘나팔바지’도 싫고, 공짜 만화 좀 봤다고 매몰차게 쫓아내는 가게 아저씨도 싫고, 아빠가 없다고 짓궂게 구는 학교 녀석들도 꼴보기 싫다. 어느 날, 아빠를 놀리는 학교 친구와 한 판 붙은 탓에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숀은 집으로 오는 길에 ‘스킨 헤드’ 우디(조셉 길건) 패거리와 마주친다.

아빠를 향한 숀의 그리움을 눈치 챈 우디는 친구 겸 보모로 숀을 돌보고, 숀 역시 다정한 우디를 따르며 둘은 나이를 넘어 친구가 된다. 숀의 눈에 우디는 ‘최고의 남자’다. 예쁘고 상냥한 여자친구도 있고, 그를 대장으로 모시는 패거리도 있다. 우디처럼 되고 싶은 숀은 ‘꼬마 스킨헤드’로 거듭난다. 삶의 방식을 처음 스스로 선택하는 숀의 성년식은 덥수룩한 박박 머리를 밀고, ‘닥터 마틴’ 부츠를 신는 것이다.

‘스킨헤드’ 숀의 아홉 살 인생은 흥미진진해진다. 우디 패거리와 함께 동네를 쏘다니고, 대마초와 맥주를 몰래 마시며 어른 흉내도 내고, 자기보다 키가 두 배는 큰 예쁜(?) 여자 친구와 진한 어른의 키스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숀의 앞에 콤보(스테판 그레이엄)가 나타난다. 우디의 절친한 친구로, 몇 년 전 사고를 치고 감옥에 다녀온 콤보의 등장으로 우디 패거리는 갈라지기 시작한다.

강한 남성성과 카리스마로 단숨에 우디를 제압한 콤보는 새로운 대장이 되고, 숀은 우디를 버리고 콤보를 따르기로 마음먹는다. 같은 스킨헤드 족이지만 우디와 달리 비뚤어진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자인 콤보. “바다 건너 들어 온 싸고 쉬운 노동력이 우리마저 싸구려처럼 만들고 있어. 왜 영국남자들이 전쟁터에 끌려가 개죽음을 당해야 하지? 너도 아빠의 죽음이 의미 있길 바라잖아! 그렇다면 영국의 힘을 되살릴 남자가 되야 해!” 콤보의 일장 연설은 숀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우리 영국인이 잘 살기 위해서, 다른 민족인 ‘그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는 극단적 배타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는 폭력적 인종차별주의로 변질된다. 80년대 영국엔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분노를 해결하려는 인종차별적 폭력이 팽배했다. 폭력의 특징은 쉽고 빠르게 일상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숀은 난생 처음 분노가 폭력으로 번지는 과정을 직접 경험한다. 짜릿한 쾌감과 밀려드는 죄책감. 아홉 살 소년에게 너무 무겁고 어려운 고민이지만, 누구도 대신 풀어줄 수 없다.

<디스 이즈 잉글랜드>는 빼어난 성장담이자 날카로운 회고담이다. “숀의 에피소드는 대부분 내 기억에서 탄생했다”는 메도우즈 감독은 애정과 반성을 담아 영국의 80년대를 재현한다. 사회문제를 개인의 삶에 녹여 넣는 솜씨로 치면, 아마 영국 영화가 세계 최고일 듯하다. 특히 80년대는 영국 감독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문제적 시대’다.

최고의 영국 청춘영화로 꼽히는 대니 보일 감독의 <트랜스포팅>은 청년실업이 극에 치닫던 그 시절과 그 안에서 삶의 돌파구를 찾아 달리고 또 달리는 비루한 청춘을 엮은 수작. 피터 카타니오 감독의 <풀몬티>는 대처 정부의 주도 아래 벌어진 대대적인 기간산업 구조조정 문제를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철강회사 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해 스트립 댄서로 거듭나는 코미디로 풀어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의 탄광산업이 사양기로 접어들면서 평생의 일터에서 힘없이 쫓겨나야 하는 탄광촌의 비애와 날아오르려는 ‘발레 소년’의 성장담을 녹인 감동의 성장 드라마다.

문제적 시대를 회고하면서도 유머와 애정을 잃지 않는 영국의 ‘80년대 배경 명작’ 목록에 <디스 이즈 잉글랜드>를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감독의 섬세한 관찰의 시선과 향수 어린 80년대의 음악이 만들어 준 근사한 무대를 장악한 숀 역의 토마스 터구스를 눈여겨 봐야 할 듯.

“오디션 참가했으니 내게 비용을 내라”는 당돌한 요청으로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이 신인배우는 소년의 눈동자에 청년의 불안한 흔들림을 담아내며, 데뷔작에서 최고의 명연기를 선보인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