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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과 불신이 불러낸 공포

공포영화 관객을 가장 공포에 떨게 하는 건, 전혀 무섭지 않은 공포영화다. 영화 표 값과 시간만 잡아먹고 내빼는 공포영화를 떠올리면 식은 땀이 절로 난다. 이런 의미에서 한동안 한국 공포영화를 보기가 무서웠다.

툭하면 째지는 비명소리와 와장창 깨지는 소리, 뼈가 덜그덕 거리는 소리, 손톱으로 벽 긁는 소리를 잔뜩 집어넣고, 머리를 풀어헤친 ‘사다코’의 동생들을 던져 놓으면 공포영화가 만들어지는 줄 착각하는 영화들 탓이다. 성공한 선배 공포영화들의 장점을 재탕, 삼탕 하기에 급급한 아류작이 쏟아지는 것도 문제였다.

구멍이 숭숭 뚫린 허술한 이야기도 비명대신 실소가 터지는 데 한 몫 했다. <장화, 홍련> 이후 흥행수치를 떠나 한국 공포영화의 체면치레를 한 건 <어느날 갑자기: D-day>와 <기담> 정도. 올해도 뾰족한 송곳처럼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한국 공포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한 채, 후텁지근한 여름과 이별하는 줄 알았다. 이용주 감독의 <불신지옥>을 보기 전까지는.

<불신지옥>은 한 소녀의 실종사건에서 출발한다. 서울에서 혼자 살며 고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희진(남상미)는 엄마(김보연)의 다급한 전화를 받는다. 여동생 소진(심은경)이 사라졌다는 것. 급히 교외의 집으로 내려간 희진은 소진의 행적을 수소문하지만 별 성과가 없다.

희진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려고 하지만, 엄마는 하나님께서 소진을 찾아주실 거라며 교회에 가야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희진의 가족은 몇 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남편의 급작스런 죽음 이후 가세가 기울자 마음을 의지할 곳 없는 엄마는 교회에 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희진은 경찰서에 가서 소진의 실종신고를 하지만 형사 태환(류승룡)은 단순 가출쯤으로 가볍게 여긴다. 얼굴에 피곤이 가득한 태환은 사실 불치병에 걸린 딸을 간호하느라 심신이 지친 상태로 남의 불행을 들어줄 여유가 없다. 그러던 중, 희진의 아파트 위층에 사는 정미(오지은)의 자살사건이 벌어진다. 정미는 희진의 눈앞에서 목을 매고 추락한다.





충격 받은 희진은 정미의 유서에서 “소진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을 발견하고 소진의 실종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리고 아파트 주민들은 희진에게 “소진이 신들린 아이”였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아파트 주민들의 기이한 증언은 엇갈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점점 서로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불신지옥>은 우리사회에서 아주 익숙하고도 기이한 조합에 주목한다. 기독교와 무속신앙의 기묘한 동거. 전혀 섞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종류의 ‘믿음’은 서로 경쟁하듯 십자가와 대나무 깃대를 세워놓고 ‘믿는 자’들을 불러 모은다. 서로를 ‘사탄’ 혹은 ‘귀신’이라고 몰아붙이지만 기이하게도 두 ‘믿음’이 약속하는 건 하나다.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 모든 종교는 복을 받기를 비는 ‘기복’의 성향을 갖기 마련이지만, <불신지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오로지 ‘나의 복’을 비는 것 말곤 관심이 없다. 종교가 기복신앙으로 기울 경우에 생기는 가장 큰 폐해는 “네 믿음을 탓하라”는 말로 모든 비극을 설명하려 든다는 점이다.

자식이 병에 걸린 것도, 딸이 실종된 것도 모두 ‘내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믿어버리는’ 사람들은 점점 자신을 시험으로 몰아간다. ‘믿음’의 무아지경에 빠져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의 얼굴. <불신지옥>은 그 얼굴들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등골이 오싹한 공포가 탄생한다는 걸 명확히 알고 있다. 이 영화가 빼어난 까닭은 여기에 있다.

<불신지옥>은 공포가 피어오르는 지점이 다름 아닌 습한 우리의 현실임을 확인시킨다. 종종 어처구니없는 충격적 사건으로 사회면에 기사거리를 제공하는 ‘맹신’의 사례들이 어떻게 증폭되는지, 그 과정을 포착하는 것으로 <불신지옥>은 공포영화로서 할 일을 다 한다.

이 영화에 귀를 찢는 소음이나 공포보다는 짜증을 유발하는 깜짝쇼를 사용하지 않고도 명치 끝을 짓누르는 긴장감과 머리끝이 쭈뼛거리는 무서움을 전달한다. 누구나 갖고 있을 이기심과 무관심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건, 꿈속에서 저지른 줄로만 알았던 살인이 사실은 현실이었다는 걸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섭지 않을 도리가 없다.

봉준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이용주 감독은 ‘보고 배운 대로’ 데뷔작을 만든 것 같다. 오컬트와 미스터리, 스릴러를 오가는 장르의 공존, 영화 속 가상의 배경이라기엔 너무나도 진짜 같은 세심한 디테일, 심장박동을 높이는 리듬감, 탄탄하고 안정적인 이야기구조까지 <불신지옥>의 장점은 봉준호 감독 영화의 장점과 판박이다.

특히 세심한 디테일이 빛을 발하는 건 일상에서 채집한 공포의 요소다. 웅웅거리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기척, 언뜻 본 듯한 움직임, 칠흑 같은 어둠 속의 핸드폰 액정 불빛 등 일상의 모든 것이 공포의 세계로 안내하는 손잡이 역할을 한다. 감독이 전국을 뒤져 찾아냈다는 소도시의 낡은 아파트도 현실의 음울한 공포를 사정없이 뿜어내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극장을 나서면서 “생각보다 안 무섭네”라고 장담했다가, 혼자 방안에 앉아 자꾸 문과 창문 쪽을 흘끔거리며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게 된다. 여름의 막바지에 뒤끝이 긴 공포영화를 만나게 돼서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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