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김소영 감독의 저리도록 슬프고, 미치도록 아름다운 리얼리티

감당하기 힘든 절망과 맞닥뜨렸을 때, 인간은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일단 닥쳐온 현실을 부정한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일이!"라며 분노를 터뜨린다.

분노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해결책에 매달린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을 때는 극심한 우울에 빠진다. 절망의 실체를 탐색하는 우울의 시간이 끝나면, 비로소 절망을 받아들인다.

체념은 이 마지막 단계에서 생성되는 감정이다. 체념은 비애인 동시에 상처 입은 마음의 딱지고, 견뎌야 할 내일을 위한 에너지다. 때문에 체념은 세상의 단맛, 쓴맛, 매운맛을 다 본 어른의 눈에서 쓸쓸하게 어른거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종종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눈을 가진 아이들이 있다. 김소영 감독의 <나무없는 산>은 엄마 품에서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기댈 곳 없는 세상에 던져진 어린 자매의 '체념의 눈동자' 앞으로 관객을 불러 세운다.

<나무없는 산>은 엄마 품에서 떼어져 나와 삭막한 세상을 부유하는 여섯 살 진이(김희연)과 네 살 빈이(김성희) 자매의 이야기다. 돈 벌어 오겠다며 집을 떠난 뒤 소식이 끊긴 아빠와 생활고에 허덕이느라 두 자매를 포근하게 안아주지도 못하는 엄마.

비록 '나무없는 민둥산'처럼 허허로운 집이지만, 어린 자매에겐 세상 어디보다 포근한 움막이다. 하지만 엄마가 아빠를 찾겠다고 나서면서 진이와 빈이 자매는 소도시에 사는 고모에게 맡겨진다.

핏줄이라는 명목으로 자매를 떠맡았지만, 인생이 피곤하기는 고모도 마찬가지. 늘 술에 취해 잠이 드는 고모가 아이들을 보살펴줄리 만무하다. 그나마 고모와의 눈칫밥 살이도 오래지 않아 자매는 또 다시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시골의 외할머니 집으로 떠밀린다.

어른의 눈을 가진 아이들을 바라보는 건 꽤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 투명하고 말간 눈동자는 잘 드는 칼처럼 관객의 심장을 싹둑 베어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를 통해 익히 경험한 바 있다.

엄마에게 버려지고 길고양이처럼 살아가는 네 남매의 1년을 조용히 지켜보는 <아무도 모른다>는 관객에게 속 시원하게 울 여유도 주지 않고, 설컹설컹 심장이 조각나는 듯한 슬픔을 경험케 했다. 잔인하기론 김소영 감독의 <나무없는 산>도 만만치 않다. 영화는 어른에게도 버거운 삶의 무게를 어린 자매의 작고 여린 어깨에 고스란히 짐 지운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가며 비틀거리는 소녀들을 지켜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의 가슴은 바윗덩이가 올려진 것처럼 갑갑하다. "이 돼지저금통이 꽉 차면 데리러 올게"라는 엄마의 말을 철썩 같이 믿는 진이와 빈이는 메뚜기를 잡아 판다.

하루 종일 논 사이를 뛰어다니며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메뚜기를 잡아 번 100원짜리들을 진이는 가게에서 굳이 10원짜리 잔돈으로 바꾼다. 돼지 저금통 앞에 좌르르 10원짜리 동전을 풀어놓으며 "저금통이 빨리 차겠다"고 좋아하는 소녀들의 환한 웃음 앞에선, 가슴이 너무 메어 쉽게 울 수도 없다.



하지만 영화가 냉정하기만 한 건 아니다. <나무없는 산>엔 무턱대고 손 내미는 섣부른 동정이 없을 뿐이다. 대신 감독은 쌀쌀맞은 세상에 던져진 어린 소녀들이 무기력과 분노, 갈망과 절망을 거쳐 '체념의 눈'을 얻기까지의 아픔을 함께한다. 그 아픔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영화는 종종 극도의 클로즈업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잡는데, 속 시원하게 분노할 수조차 없는 아이들의 속내가 저릿하게 화면을 울린다.

꽉 찬 돼지저금통을 안고 먼지 풀풀 날리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는 소녀들을 멀리서 바라보던 카메라가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꼼꼼히 좆는 소녀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로 파고들 때, 엄마를 기다리는 소녀들의 절실한 마음이 저릿하게 닿는다.

"지금은 데리러 갈 수 없으니 동생 잘 보고 있어" 엄마의 짤막한 편지에 "엄마는 우리를 버린 거야"라며 펑펑 우는 진이의 얼굴을 한가득 담은 카메라는 말없이 소녀의 볼을 쓰다듬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의 고통을 가장 슬프게 전시한 뒤, 관객의 눈물을 강요하는 가학적인 아동신파에선 느낄 수 없는 진심이 전해진다.

진심을 다해 바라보는 것은 김소영 감독의 특기다. 그녀는 장편데뷔작인 전작 <방황의 날들>에선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새로운 삶의 환경에 던져진 '미국이민 1.5'세대의 일상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이물감의 실체를 건져 올린 바 있다.

김소영 감독의 진득한 '바라보기'는 <나무없는 산>에서 더욱 빛난다. 감독은 특별한 이야기나 형식을 꾸며 넣지 않고 심지어 영화 배경음악마저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나무 없는 민둥산처럼 허허로운 세상에 던져진 어린 소녀들의 '체념의 눈동자'와 지긋이 눈 맞춘다.

그 눈 맞춤은 어떤 극적인 장치보다 드라마틱하게 관객의 감정을 끌어올린다. 한 시간 반 남짓한 러닝타임동안 서서히 차오르던 눈물은 볼 위를 흘러내리는 대신 조용히 목구멍 뒤로 삼켜진다. 하지만 가끔 소녀들이 올려다보며 위안을 삼았을 쨍한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볼 때, 툭하고 눈물이 터져 흐를 지도 모른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