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드라마 속 대리모 문제선택의 문제가 된 출산… '상업적 미혼모'등 또 다른 모성 소외 불러

1-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서는 대리모라는 소재를 긍정적으로 다루었다 2-
시트콤 <프렌즈>에서 매혹적인 괴짜 캐릭터 피비(리사 쿠드로)가 해낸 최고의 위업은 바로 동생부부의 '대리모'가 된 것이었다. 이복동생인 프랭크의 아내가 아이를 갖지 못하자 피비는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기상천외한 발상을 한다.

눈치가 유난히 더딘 친구 조이(매트 르블랑)가 '대리모'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자 피비는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나는 단지 오븐이 되어주는 거야, 반죽은 프랭크 부부에게서 나왔고! 아, 피비의 오븐에서 나온 '빵'이 바로 프랭크의 아이가 되는 거구나.

실제로 영어 표현에서 여성의 자궁은 오븐(oven)에, 뱃속의 아이는 빵(bun)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동생 부부의 수정란으로 임신한 처녀 피비는 무려 세쌍둥이를 낳아 모두를 놀라게 한다. <프렌즈>의 정겨운 친구들은 '고모이자 엄마'가 된 피비를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찾는 '윈윈(win-win) 게임'을 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 경우 '대리모'라는 피비의 위치는 현재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대리출산 사이트'를 비롯한 각종 흉흉한 소문을 낳고 있는 '상업적 대리모(commercial surrogacy)'와 거리가 멀다.

피비의 결단은 아이를 갖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던 남동생 부부에게 새 삶의 기회를 선물하는 것이었고 피비 또한 언제든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 만날 수 있었다. 피비는 '엄마'이지만 '고모'인, 조금은 복잡하지만 의외로 든든한 '또 하나의 엄마이자 친구'였던 셈이다.

드라마 '천만번 사랑해'
발전된 과학기술에 대한 미국인 특유의 낙천주의일지도 모르지만, 피비는 정말 아름답고 따스한 대리모의 유토피아를 구현했다.

아기를 갖는 것이 평생 소원인 부부에게는 아이가 생기고, 아이에게는 '낳아준 엄마'와 '키워준 엄마'가 모두 생겨 그들 모두의 사랑을 받는 금상첨화의 행운(?)이 찾아오고, '오븐이 되어준 엄마'는 좀 촌수가 복잡하긴 하지만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일종의 생물학적 대모(godmother)가 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행복한 대리모의 유토피아가 존재하기 어려운 걸까. 실제로 피비처럼 아무런 경제적 대가 없이 소중한 생명의 오븐이 될 것을 자처하는 여성들은 '이타적 대리모(altruistic surrogacy)'라 불린다.

하지만 실제로 이타적 대리모를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젊은 여성들의 마지막 출구 중의 하나가 '상업적 대리모'로 귀착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대리모가 난자까지 공여하여 유전적 대리모(genetic surrogacy)가 될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 경우 단지 오븐을 빌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 빼도 박도 못할 어머니 자체일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점은 엄마가 '아버지의 부인'이 아니라는 점이고 법적인 어머니의 동의하에 정상적인 부부관계 없이 의학의 도움을 빌어 어머니가 된다는 점이지만, 상업적 대리모이자 유전적 대리모는 '어머니'로서의 그 어떤 법적 권리도 행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녀의 인권은 물론 보장되지 않으며 자기가 낳은 아이에 대한 어떤 애착도 관계 맺기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드라마 <천만 번 사랑해>의 주인공 고은님(이수경)의 경우가 바로 이 경우다. TV 드라마로까지 제작될 정도로 이제 대리모 문제는 '단지 매우 특수한 경우'로 치부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당장 간이식을 받지 못하면 죽을 위기에 놓인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은님은 어쩔 수 없이 대리모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만,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아이를 몸속에 지닌 은님의 마음에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은님은 가족들에게 외국으로 일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아무도 모르는 은신처에서 배운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태교에 힘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길이 될 것만 같은 이 당혹스러운 태교가 은님에게는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아이에게 '방울이'라는 태명을 붙이고, 뱃속의 아이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행복해 하는 은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방울아, 엄마가 말이지…….'라는 말투에 익숙해져있음을 깨닫는다. 아, 난 엄마가 아니야, 엄마는 따로 계신단다. 은님은 아버지의 수술비와 방울이의 법적 부모들을 생각하며 애써 이성을 찾으려 하지만 이미 은님과 아이 사이에는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내밀한 친밀감이 꿈틀거리고 있다.

은님은 뒤늦게 '방울이'와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자신의 진심을 깨닫고 대리모 중개인의 감시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끝내 아이를 빼앗기고 만다. 은님은 심부름센터 직원까지 동원하여 대리모 중개인을 찾아내 방울이의 법적 부모를 찾으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앤서니 기든스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친밀성(intimacy)'의 구조가 바뀌게 된 결정적인 변화가 '조형적 섹슈얼리티(plastic sexuality)'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콘돔의 발명을 비롯한 각종 피임기술의 혁신은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생식'으로부터 해방시켰고, 인간은 좀 더 자유롭게 좀 더 다채로운 성적 친밀성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조형적 섹슈얼리티는 재생산의 필요로부터 해방된 탈중심화된 섹슈얼리티라는 것이다. 임신의 공포로부터 '기술적으로' 해방된 여성들은 전보다 분명 자유로운 사랑과 성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미혼모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이슈이며 대리모라는 기상천외한 '과학기술의 총아'는 또 다른 차원의 모성의 소외를 낳고 있다.

이토록 당혹스런 불합리와 인권의 파괴가 공공연한 비밀이 된 사회에서 모성은 정말 피임기술처럼 '플라스틱'해진 것일까.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은 '대리모가 된 생물학적 엄마와 대리모를 이용한 사회적 엄마 중 누가 더 불행할까?'라는 멜로드라마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친아버지와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섹스나 사랑조차 없이도, 절절한 모성은 태어난다. 대리모와 아기 사이에서 탄생한 이 대체불능의 친밀성은 한 몸에 두 사람이 공존하는 생물학적 비밀 속에 도사리고 있다.

대리모라는 사실이 평생 아이에게 비밀로 남을지라도 그 아이의 세포 속에는, 그 아이의 무의식 속에는, 이 세상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절박한 자궁의 추억이 평생 꿈틀거리지 않을까.

아이를 낳을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진정 '플라스틱'하게, 자유롭고 유연한 선택의 문제로 변했지만, 인간의 마음도 과연 그 속도에 발맞추어 '플라스틱'해진 것일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