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닐 블롬캠프 감독의 기발한 상상력, 놀라운 비주얼 그리고 날선 정치풍자의 성공적 접목

SF는 정치적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훌륭한 SF'는 모두 정치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과학적 상상, 즉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과학적으로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이야기를 의미하는 SF의 배경은 미래.

과학 기술이 쌓여 예를 들면 누구나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닐 그 '미래'엔 현실에서 풀지 못한 많은 문제들도 쌓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듯,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도 등장할 것이다.

'훌륭한 SF'들은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희한한 볼거리만큼이나 충분히 공감 가는 미래의 사회상을 구현해 왔다. 결국 SF가 "이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장르라면, 삶의 문제를 푸는 방법론 즉 '정치'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닐 블롬캠프 감독의 <디스트릭트 9>은 매우 훌륭한 SF라 부를 만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그는 <디스트릭트 9>을 통해 SF의 단골 소재인 외계인과 인류 정치사상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인 '인종차별'을 성공적으로 접목시켰다. 기발한 상상력, 놀라운 비주얼 그리고 날선 정치 풍자가 켜켜이 쌓인 이 참신한 SF를 보고 있자면, 최근의 할리우드산 SF들이 얼마나 정체되고 무뎌져 있었는지 실감하게 된다.

가까운 미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거대한 우주선이 '정차'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상공에 떠 있는 것 이외엔 어떤 움직임도 없다. 기다리다 못해 우주선에 구멍을 뚫고 들어간 인간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기가 막힌 상황에 직면한다.

그 안에는 수 백만 명의 '외계난민'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놀라운 과학문명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주선 속 외계인들은 그곳을 탈출하는 방법도 모를 만큼 무력하다. 결국 인간들은 '구조팀'을 급파해 외계인들을 지구로 이주시킨다. 영화는 '역사적인 외계인 이주사건'이 발생한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곤충과 갑각류를 섞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외계인들은 요하네스버그 빈만가의 쓰레기더미 위에 살고 있다. 인간들에게 외계인은 더 이상 낯선 생명체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귀찮은 불청객으로 전락했다. 인간들은 그들을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벌레'라는 뜻의 '프런'이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거리엔 '외계인 출입금지' 간판이 내걸려 있다.

결국 지도층은 "사회의 안전을 위해" 외계인을 '디스트릭트 9'이라는 지역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외계인 전담반 MNU에게 강제 격리작전을 지시한다. MNU의 직원 비커스(살토 코플리)는 용병들과 함께 외계인 격리작전에 나섰다가 이상한 액체에 노출되는 사고를 당한다. 그 액체는 지난 20년 간 지구를 벗어날 방법을 찾던 외계인 과학자 크리스토퍼가 우주선의 동력으로 쓰기위해 모아놓은 외계 유전자 물질. 이 물질에 노출된 비커스의 몸이 외계 유전자와 반응하면서 그는 조금씩 외계인으로 변이되어 간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벌어지는 무력한 외계인 강제 격리. 현실과 미래가 교묘히 섞인 <디스트릭트 9>의 설정은 즉각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폭압적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의 관객들에겐 낯설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관객이라면 '디스트릭트 9'이라는 제목에서 바로 과거의 실제 사건을 연상했을 것이다.

196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케이프타운의 주거지역을 '백인 전용'의 '디스트릭트 6'로 규정하고, 그 지역에 사는 흑인들을 25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 물론 "사회의 안전을 위한 결정"이라는 설명과 함께. 1979년생인 블롬캠프 감독은 18살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갔지만, 어린 시절을 관통했던 고향의 참혹한 현실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혹은 이 재능 있는 SF감독은 본능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엄혹한 현실이 SF의 훌륭한 배경이 될 것임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참신한 아이디어에 매료된 '판타지의 황제' 피터 잭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인감독 블롬캠프는 자신의 SF 유전자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실을 완벽하게 접목시켰다.

하지만 <디스트릭트 9>는 정색하고 달려드는 '정치영화'가 아니다. 대신 모다큐멘터리(가짜 다큐멘터리)를 무기 삼아 직설적인 농담을 빼곡히 박아 넣었다. MNU가 외계인을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형식적인 동의를 받는 장면, 정부 관계자들이 외계인의 무기를 사용하기 위해 안달하는 장면, 요하네스버그 빈민가를 장악한 아프리칸 갱단이 외계인을 상대로 장사하는 장면 등에선 감독의 재기발랄한 유머감각이 빛난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외계인 과학자의 이름을 '크리스토퍼'라고 지어 준 것이다. 극심한 인종차별에 시달렸던 흑인들이 이름만이라도 '백인 식'으로 불리길 원했던 한때의 유행을 빗댄 뼈 있는 농담이다.

이처럼 많은 장점이 있지만 <디스트릭트 9>를 "내 인생 최고의 SF"라며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는 어렵다. 그러기엔 "왜?"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디스트릭트 9>이 지금까지의 'SF의 관습'을 깨고 다음 단계로 한 걸음 내딛은 선구적 영화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외계인 SF에서 모든 외계인은 '적 아니면 친구'였다. 외계인이 적이라는 설정은 '미지의 외부적 존재'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를, 반대로 친구라는 설정은 그 공포를 애써 외면하려는 낙관주의를 대변했다. 하지만 <디스트릭트 9>에서 외계인은 곧 '우리'다. 감독은 우리의 '구분 짓기'에 따라, 누구라도 '외계인' 취급을 받을 수 있는 현실을 직시하길 권한다.

그 현실은 지금까지 등장했던 어떤 미지의 존재보다 잔인하고 광폭하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잔혹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희망을 찾고자 노력한다. 쓰레기 더미를 뒤져 꽃을 만드는 비커스의 마지막 모습은 "3년 뒤에 반드시 돌아오겠다"며 우주선을 타고 떠난 크리스토퍼의 약속과 맞물리며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3년 뒤, 비커스와 크리스토퍼의 재회를 극장에서 볼 수 있길 바란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