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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같은 안개 속으로의 초대

[시네마] 박찬옥 감독의<파주>
몽환적인 영상과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이는 심리극
'안된다고 하니까 더 갖고 싶어졌다' 박찬옥 감독의 <파주> 포스터 문구는 도발적이다. "왜? 안 돼?"라고 당돌하게 따져 묻는 것 같은 서우의 눈빛이 더해져 도발의 느낌은 더욱 강렬하다.

박찬옥 감독이 <질투는 나의 힘>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파주>는 짧은 시놉시스만 보자면 전형적인 '금기 멜로'를 상상하게 만든다. 죽은 언니의 남편을 사랑하는 동생과 처제에게서 여인을 발견해버린 형부의 허락받지 못한 사랑. 공개된 파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영화가 흘러갈 길을 상상하며 극장에 들어섰다면, 적잖이 당황할지도 모른다.

<파주>는 금단의 사랑이 열매를 맺는 격정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끝내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입에 머금은 채, 짙은 안개의 늪 속으로 빠져 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3년간의 긴 인도 여행을 마치고 고향 파주로 돌아오는 은모(서우)의 얼굴에서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지만, 그녀의 얼굴엔 조금도 편안한 기색이 없다.

지친 표정으로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는 은모의 눈동자에선 오히려 미세한 불안의 기운이 엿보인다. 그럴 것이 고향 파주엔 그녀를 맞아줄 사람이 없다. 하나뿐인 혈육이었던 언니 은수(심이영)는 오래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언니의 죽음 이후 보호자를 자처했던 형부 중식(이선균)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인도 여행을 떠났던 터다.

은모가 파주로 돌아가는 이유는 그곳 말곤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주에서 은모는 난개발로 피해를 입고 있는 철거민들과 함께 재개발 반대 투쟁을 하고 있는 중식과 마주한다.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엔 반가움보다 당혹감이 흐른다.

이유는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서로의 감정 때문이다. 영화는 불쑥 과거로 돌아가 두 사람의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들려준다. 8년 전, 서울에서의 어떤 사건 때문에 도망치듯 파주로 내려 온 중식은 선배의 교회에 머물기 시작한다.

교회의 잔일을 하고, 공부방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쓸쓸한 뒷모습을 가진 은수를 만나게 되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은수의 어린 동생 은모는 가난한 공부방 선생인 중식에게 노골적으로 싫은 감정을 드러내고, 집을 나가기에 이른다.

그러나 갑작스런 언니의 사고 이후, 중식은 은모의 보호자가 되고 그들은 함께 살아간다. 평화로운 생활도 잠시, 은모는 형부인 중식에게 연모의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허락받을 수 없는 감정이 자신을 집어삼킬까 두려웠던 은모는 돌연히 인도로 떠났던 것이다.

영화는 은모가 돌아오면서 묻어놨던 질문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은모는 왜 돌아왔고, 중식은 왜 떠나지 못했는가. 질문은 꼬리를 문 뱀처럼 계속 엉켜 들어간다.

중식은 왜 이곳으로 숨어들었는지, 그리고 왜 은수와 결혼했는지, 마지막으로 은수는 왜 죽음을 맞아야 했는지. 박찬옥 감독은 애초에 이 무거운 질문들에 속 시원한 답을 들려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녀가 보고 싶었던 것(혹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절대로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인물들의 얼굴이다. 종종 몽롱하고 축축한 안개가 걷히는 순간, 관객은 은모와 중식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대면하게 된다. 그 속에 담긴 두려움의 흔적을 좇다 보면, 은모와 중식이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직감하게 된다.

박찬옥 감독은 수직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이야기를 한 점으로 모아주는 대신, 시간과 감정의 분절을 수평적으로 분산시키면서 감정의 파장을 넓혀 나간다. 이런 방식은 전작 <질투는 나의 힘>과 유사하다.

등장인물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한 사건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도구로 활용된다. <파주>에서도 은모와 중식의 '관계'가 학생과 공부방 선생, 처제와 형부, 금단의 사랑을 욕망하는 연인으로 변화함에 따라 '그들 각자의 이야기'의 진폭이 커지는 식이다.

반면 달라진 점을 꼽자면, 영화적 장점을 최대한 살린 화면일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이 꼼꼼하고도 일상적인 문장으로 완성된 내밀한 일기장이었다면, <파주>는 인상적인 단어들로 채워진 시처럼 다가온다.

불필요한 접속사 없이 단어를 접붙인 실력이 박찬옥 감독의 것이라면, 인상적인 단어를 추려낸 힘은 김우형 촬영감독의 것이다. 김우형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음습하지만 축 쳐지지 않고, 희미하면서도 명료한 인상적인 장면들을 건져낸다.

그리고 배우들이 있다. 누구 하나 움푹 파인 골이 없다. 너무 감미로운 목소리 탓에 연기의 섬세함이 가려졌던 이선균은 <파주>를 통해 드디어 목소리보다 표정 연기가 돋보이는 인물과 만났다. 은수 역의 심이영은 비록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 않지만 관계의 연결고리로서 충분히 각인될 만한 인상적인 아우라를 남긴다.

은모 역의 서우는 한마디로 무시무시하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20대 초반의 여인에 이르는 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 황당할 정도다. 그 나이에 맞는 감정을 자로 잰 듯 측정하고, 정확한 순간에 분출하는 그녀의 연기는 거의 본능적인 것 같다. 특히 우는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이와 상황에 맞게 완벽히 다른 눈물을 흘리는 연기라니.

<미스 홍당무>의 주목할 만한 신인이 영화 한 편을 혼자 힘으로 끌고 가기에 전혀 무리 없는 배우로 성장했다. 오프닝과 엔딩에 등장하는 서우의 얼굴만으로 영화의 알맹이가 짐작된다. 한국영화계는 무서운 여우(女優)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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