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 없이 등장하는 드라마와 가요계 속 남장 여자의 진실

1- 그룹 F(x)의 설리, 엠버, 크리스탈, 루나(왼쪽부터) 2-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긴 머리 여자가 거울 앞에 섰다. 가위로 싹둑싹둑 머리를 잘라내고 압박 붕대로 가슴을 칭칭 동여맨다. 그리고 결연한 눈초리로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본다.

별로, 아니 하나도 남자 같지 않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말도 안되게 속아 준다. TV와 스크린을 통해 반복된 남장 여자 탄생의 전형적 순간이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미남이시네요>는 사고로 활동을 못하게 된 쌍둥이 오빠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한 수녀 아가씨가 남성 4인조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들어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박신혜는 극중 고미남을 연기하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잘랐다. 목소리도 의식적으로 걸걸하게 내며 '형님~'이란 호칭을 입에 달고 산다. 밥을 먹을 때는 남성성의 극단적인 표현을 위한 것인지 입 주변에 온통 묻히면서 양껏 먹는다.

이 모습은 2년 전 화제작 <커피 프린스>의 윤은혜와 그대로 겹쳐진다. 짧은 머리, 유니섹스 캐주얼, 중성적인 목소리, 털털한 성격. 남장 여자 캐릭터는 왜 이토록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가는 것일까.

드라마 '미남이시네요'의 박신혜
"언니~ 사랑해요!"

"여자들이 좋아하니까요"

대중문화평론가 강명석에 따르면 고미남은 남자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캐릭터는 아니다.

"남자 아이돌 그룹의 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여자들의 관심사잖아요. 박신혜도 예쁘긴 하지만 남자들을 노린 캐릭터라고 볼 수는 없어요."

남자 같은 여자에 대한 여자들의 선호는 그 역사가 꽤 오래됐다. 한국 대중문화사를 돌아보면 담다디를 불렀던 이상은을 최초의 사례로 꼽을 수 있고, 국경을 넘어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소설 <작은 아씨들>의 터프한 둘째 딸 조에 대한 여성 독자들의 편애가 기억난다. '동종, 동성이 가장 큰 적'이라는 말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캐릭터의 인기는 납득이 가는 부분이다.

여성성이 거세된 여자란 TV를 보는 여성 시청자들을 질투심이나 열등감 등 불편한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예쁜 여자 보기 싫어 대신 남장여자를 본다? 그러기에는 윤은혜와 박신혜는 남장을 해도 너무 예쁜 얼굴이고 중간중간 메이크 오버(make-over)까지 감행한다. 게다가 <작은 아씨들>에서 연약한 공주과인 셋째 베티의 엄청난 인기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남장 여자 캐릭터의 진짜 매력은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황소 개구리처럼 그가 기존의 성 관계도를 교란시킨다는 데 있다. <미남이시네요>는 등장 인물들의 귀여운 외모와 코믹한 상황으로 미화되어 있지만 사실 설정 자체는 상당히 난잡해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구조다. 남자들의 소굴로 들어간 수녀, 그것도 언제 들킬지 모르는 어설픈 남장을 한 수녀라니. 19금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지금처럼 평화로운 전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시청자들을 자극하는 것은 표면상 남자와 남자라는 설정 때문에 잦은 빈도로 이루어지는 스킨십, 그 이상의 무엇이다. 그 중 하나가 동성애 코드다. 극중 아이돌 그룹의 멤버인 제르미(이홍기 분)는 고미남이 여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남자에게 끌리는 자신에게 혼란을 느낀다.

최근 데뷔한 아이돌 그룹 에프엑스는 살벌한 걸 그룹 전쟁터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멤버 중 한 명인 중국계 미국인 엠버의 외모다.

짧게 자른 머리가 아니더라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릴 정도로 중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 엠버는 나풀거리며 춤추는 4명의 멤버들 사이에서 명확하게 다른 드레스 코드와 목소리, 동작으로 남성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재미있는 것은 팬들이 엠버 개인뿐 아니라 엠버와 다른 4명과의 관계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엠버가 다른 멤버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문을 대신 열어주는 영상이 팬들의 캠코더를 통해 인터넷으로 퍼져나가면서 그룹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레즈비언이라는 키워드는 최근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뮤직 비디오와 영화 <오감도> 등을 통해 종종 등장했지만 홍보를 목적으로 또는 은유적으로 살금살금 등장했던 것들이 이제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맞먹는 생생하고 다채로운 화면으로 바뀌어 팬들 앞에 펼쳐진 것이다. 10대 소녀들이 열광하는 코드 한 가운데 동성애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능수능란한 기획사의 과감한 승부수다.

남장 여자가 만드는 아슬아슬한 성 생태계

심리학자 장근영은 이를 두고 사춘기 소녀들만의 성욕 분출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사춘기 여학생의 성적 욕구는 또래 남자 아이들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고 때론 뒤틀린 방식으로 표현된다. 남자들은 여체를 궁금해하고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이 전부지만 여자들은 성적 호기심과 더불어 남자의 몸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는다.

이런 것들이 모여 동성애에 대한 선호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소녀들은 남자와 남자, 또는 여자와 여자 간의 사랑에서 한층 안도감을 느끼며 지지한다. 본인이 동성을 사랑하는가와는 별개의 문제다. 한 마디로 소녀들에게 있어서 동성애란 '순화된' 혹은 좀 더 '담백한' 연애인 셈이다.

<동성애의 심리학> 저자 윤가현 교수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더 보탠다. 남녀 관계는 임신의 가능성, 처녀성의 상실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소녀들이 단순한 성적 호기심으로 접근하기에는 너무 무거워 대신 동성애로 눈을 돌린다는 것이다.

물론 10대를 지난 후에도 동성애 콘텐츠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진다. <미남이시네요>는 물론이고 <커피 프린스> 역시 10대부터 30대까지 폭넓은 시청자 층을 거느렸고 영화 <왕의 남자>나 <쌍화점>은 아예 20~30대 여성들이 주요 관객층이었다.

커밍 아웃하는 이반들이 늘어나고 이를 용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한국의 성문화가 빠르게 다원화하고 이를 반영하는 대중 문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급박한 현장의 한 켠에 남자의 모습을 한 여자가 서 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이 애매한 개체는 상황에 따라 성 정체성을 휙휙 바꿔가며 다양한 관계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위험한 캐릭터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수위는 아직은 귀여운 수준이다. 고미남은 누가 봐도 여자고, 결국에는 머리를 기르고 붕대를 풀어 남자 주인공과 해피 엔딩(?)을 맞이하며 어른들을 안심시킬 것이다. .

그러나 나중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남자와 눈을 마주쳐도 여자와 눈을 마주쳐도, 아무나 눈만 맞았다 하면 러브 테마송이 울려 퍼지는 상황이 연출될 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십 수년 전 유행했던 일본 만화 <란마 1/2>에서는 뜨거운 물을 부으면 남자, 찬 물을 부으면 여자로 변하는 주인공이 등장했다.

귀여운 등장 인물들에 가려졌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성 관계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난교가 떠오를 만큼 묘하고 파격적이었다. 그렇다면 남장 여자 캐릭터는 성 질서 붕괴의 시작 또는 아이콘쯤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