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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보듬고 살아가는 법

[Cinema]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제노바>
낯선 도시 속 흔들리는 카메라가 잡아낸 상실의 고통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때, 흔히 이렇게 말한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된다.

그러니 당신도 극복할 수 있다." 몸의 상처에 새살이 돋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말끔히 회복될 것이라는 말을 믿고 싶긴 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은 갑작스런 사고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한 가족의 이야기 <제노바>를 통해 조금 다른 방식의 위로를 들려준다.

언제나처럼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켈리(윌라 홀랜드)와 메리(펄라 하니-자딘)에게 그 날은 어제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어린 메리가 장난을 치지 않았다면, 언니 켈리가 동생의 장난에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면, 하필 그 순간 맞은편에서 차가 달려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메리의 장난은 자동차 사고로 이어졌고, 어린 딸들은 눈앞에서 엄마를 잃었다. 갑작스런 사고로 이 가족의 일상은 산산조각 난다.

떠난 사람의 빈자리보다 괴로운 건, 남은 사람들의 죄책감과 갈 곳 없는 원망이다. 자기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어린 메리는 매일 밤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고, 큰딸 켈리는 사고 후유증으로 가족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조(콜린 퍼스)는 사고에서 살아남은 딸들이 괴로울까봐 마음껏 목 놓아 울 수도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린 딸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기 시작하자, 조는 가족과 함께 미국을 떠나 제노바에서 새 삶을 꾸릴 계획을 한다.

아름다운 도시 제노바에 도착한 조의 가족들은 평안해 보인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조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활기를 되찾고, 켈리와 메리도 겉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윈터바텀 감독의 카메라는 미세한 불안의 기운을 놓치지 않는다. 제노바에 처음 도착한 가족의 시선으로 도시의 전경을 훑는 카메라는 별 다른 설명 없이도 가족의 심경을 전달한다. 여행도 휴양도 아닌 엉거주춤한 이주. 가족들은 입 밖으론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이야기하지만, 마음속으론 자신들이 이곳으로 도망쳐왔음을 알고 있다.

낯선 곳으로 도망친다고 한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은 이 가족이 숨 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아직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서로를 보듬어 줄 여력이 없다.

<제노바>는 가족 각자가 묻어 두고 있었던 상처를 드러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켈리는 매일 밤마다 술과 섹스에 탐닉하는 것으로 상처를 잊으려 애쓰고, 조는 큰 딸의 일탈을 눈치 채지만 그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는 자책감에 애써 모른 척한다.

어린 메리는 매일 밤 엄마를 찾으며 우는 대신, 엄마의 영혼이 자신을 찾아온다는 환상에 빠진다. 조는 아내의 빈자리를 메우며 딸들을 지켜야한다는 책임감과 새로운 이성을 향한 끌림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애써 태연한 척하는 가족들을 대신해 심연의 불안을 드러내는 것은 흔들리는 카메라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맑은 하늘도, 파도가 일렁이는 아름다운 바닷가도, 예스러운 제노바의 골목길도 감상의 대상이 못된다.

도망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도시 제노바는 또 다른 유형지일 뿐이다. 윈터바텀 감독의 카메라는 제네바의 풍광 곳곳에서 불안을 포착한다. 낯선 이탈리아 어가 둥둥 떠다니는 제노바의 풍광은 아름답기보단 공포스럽다.

특히 메리의 시선으로 보는 제노바는 웬만한 호러영화의 배경보다 무섭다. 키 작은 소녀의 눈높이로 바라본 좁은 골목길은 숨이 꽉 막힐 만큼 갑갑하고, 올려다 본 하늘은 조각조각 갈라져있다. 영화는 낯선 도시에 내팽개쳐진 소녀의 두려움을 여과 없이 전달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과 공포는 애처로움과 맞닿아 있다. 이 영화의 장점은 어누 누구에게도 잘못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술과 섹스, 대마초에 기대는 켈리의 방황은 안쓰럽고, 새로운 이성에 몸 사리는 조의 방어는 애처롭다.

가장 마음이 아픈 건 어린 메리의 환상이다. 메리가 홀로 어두침침한 골목길을 걷거나, 한밤중에 울다 깨어날 때 등장하는 엄마의 영혼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관객은 메리가 엄마의 영혼과 만날 때 안심하게 된다.

상실의 고통에 맞닥뜨린 인물들의 전형적인 갈등을 담고 있는 <제노바>를 보며, 조금 놀랄 만한 감정에 휩싸이는 건 앞서 말한 조금 다른 위로의 방식 때문이다.

<제노바>의 클라이맥스는 거의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 벌어진다. 조는 마음이 끌린 여학생과 데이트를 즐기다가 딸들과의 약속에 늦고, 켈리 역시 새로 사귄 남자친구만 믿고 멀리 떨어진 해변으로 놀러 나왔다가 메리를 데리러 갈 시간을 놓치고 만다.

아빠와 언니 없이 홀로 제노바의 골목길을 걷던 메리는 엄마의 환상을 보게 된다. 정신없이 엄마를 쫓아가던 메리는 위험천만한 도로 위에 선다.

또 다시 엄마를 잃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로를 건너던 메리는 가까스로 아빠와 언니의 도움을 받아 사고를 면한다. 이 순간, 부둥켜안은 세 사람은 그간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는다. 상실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윈터버텀 감독은 <제노바>를 통해 섣불리 상처의 치유와 극복을 말하지 않는다. 조와 켈리, 메리는 결코 그날의 상처를 완전히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다. 그날의 사건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죄책감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평생토록 서로에게 풀지 못할 원망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삶을 지속하기 위해선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예상할 수 없을 상처들과 함께 살아갈 길은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상처는 치유하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보듬고 가는 것이라는 <제노바>의 위로가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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