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 브로큰 임브레이스>끝내 가질 수 없는 사랑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의 울림

투박하게 말하자면, 모든 이야기의 구조는 결국 스릴러다. 대체 다음 순간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청중에게 궁금증을 유발하지 못한다면 그 이야기는 실패다. 하지만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란 없다. 성패는 긴장감에 있다.

제 아무리 죽이는 이야기라도, 화자가 첫 문장의 운을 띄워놓고 저 혼자 흥분해 더듬거리거나, 웃긴 이야기를 하면서 먼저 웃어버리면 지루할 뿐이다. 반면 재능 있는 이야기꾼은 뻔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탈바꿈시킨다.

뻔한 불륜도 세기의 사랑이 되고, 뻔한 이별도 가슴을 울리는 비극이 된다.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 방면에 가장 재능 있는 이야기꾼 중 하나다.

매 영화에서 그는 다소 뻔해 보이는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 긴장감을 최대로 고조시킨 구성으로 새롭게 직조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황홀한 색감을 첨부한다. 듣기에 훌륭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이야기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전매특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감독의 신작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이야기만 따지자면 흔하디 흔한 신파 멜로의 탈을 쓰고 있다. 스페인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대재벌 에르네스토 마르텔(호세 루이스 고메즈)는 젊고 아름다운 비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에게 빠져 있다.

가난한 레나는 암투병 중인 아버지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어쩔 수없이 콜걸 생활을 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안 에르네스토는 레나에게 아버지의 병원비로 환심을 사고, 레나는 결국 그의 정부가 된다.

늙은 갑부와 젊고 아름다운 정부. 이야기를 위해선 이 둘 사이에 당연히 세 번째 주인공이 필요하다. 언제나 배우를 꿈꿔왔던 레나는 촉망받는 감독 마테오(루이스 호마르)의 신작 오디션을 찾아가고, 두 사람은 역시나 첫 눈에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만약 영화가 스토리의 시간 순서대로 진행됐다면 지루했을까? 감히 그랬을 것이라 장담할 순 없다. 하지만 알모도바르 감독이 이런 평면적인 이야기를 그냥 내버려 둘 리도 없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중심 이야기에서 16년 후부터 시작한다.

궁금한 상황 투성이다. 대재벌 에르네스토는 사망했고, 아무도 레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며, 감독 마테오는 시력을 잃고 작가 해리 케인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어느 날, 해리 케인에게 레이 X라는 가명의 젊은 감독이 찾아온다.

레이는 엄청난 계약금을 걸고 해리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강압적으로 부탁한다. 레이가 원하는 건 "아버지에게 사랑받기 위해 온갖 애를 썼지만, 결국 버림받고 그의 기억에 복수하는 아들의 이야기"다. 해리는 레이의 정체를 직감한다. 레이는 사망한 에르네스토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과연 해리는 왜 장님이 되었고 마테오라는 이름을 버렸는지, 에르네스토와 레나, 레나와 마테오의 삼각관계는 어떻게 결론났는지, 레이는 왜 해리를 찾아왔는지.

감독은 산더미처럼 쌓인 관객의 궁금증을 즐기듯,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통해 한 조각씩 이야기의 퍼즐을 맞춰 나간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현재와 과거가 오가고,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기억 속의 기억이 포개지며, 영화 속 영화가 상영된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구성이지만, 이야기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감독의 재능 덕에 거슬림 없이 몰입하게 된다.

'부서진 포옹'이라는 의미를 가진 제목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영화의 주제는 '가질 수 없음'이다. 사랑은 더욱 그렇다. 영화에는 끝내 가질 수 없는 사랑이 산산이 부서지는 두 번의 순간이 담겨있다.

그 두 장면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 부서짐은 에르네스토와 레나의 사랑이다. 에르네스토는 휴일도 없이 촬영에 매달리는 레나를 보며 그녀가 마테오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직감한다.

알면서도 그는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는 명목으로 아들에게 마테오와 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한다. 화면은 볼 수 있지만, 음성이 녹음되지 않는 탓에 에르네스토는 독순술 전문가를 고용해 그들의 대화를 읽어낸다. 레나의 입술에서 자신에 대한 욕설이 쏟아져 나오는 걸 들으면서도 에르네스토는 레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마테오와 밀회를 즐기고 나온 레나는 자신을 감시하던 카메라에 대고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촬영한 장면을 보고 있는 에르네스토 뒤로 다가와 자신의 입모양에 맞춰 이별의 말을 더빙한다. 격분한 화면 속의 레나와 극도로 차분한 현실의 레나가 함께 이별을 선언하는 장면은 <브로큰 임브레이스>의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두 번째 부서짐은 마테오와 레나의 사랑이다. 에르네스토의 집착을 피해 도망친 두 사람은 작은 해변가 마을에 둥지를 튼다. 레나를 불러들이기 위해 에르네스토는 미완성된 마테오의 영화를 개봉시키고, 자신의 영화가 어떤 꼴로 개봉할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마테오는 마드리드로 떠난다. 그리고 그 길에서 모든 것을 잃는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두 개의 사랑이 부서지는 그 순간을 기적처럼 영화에 담아낸다. 두 장면은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의 존재이유처럼 보인다.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찬란한 허구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은 욕구. 영화란 채울 수 없는 욕구가 만들어내는 애처로운 안간힘인 것이다. 눈 먼 마테오가 레나와의 마지막 순간이 담긴 영상을 쓰다듬는 장면은 이 사실을 진한 울림으로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페넬로페라는 보석을 빼놓고는 <브로큰 임브레이스>를 말할 수 없다. 아마 페넬로페 크루즈를 가장 아름답게 찍어내는 감독은 단연 알모도바르일 것이다(<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의 우디 앨런은 아차상 감이다).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붉은 색만 수집해 놓은 것 같은 인상적인 화면 위에서 페넬로페 크루즈는 또 한번 여신의 면모를 드러낸다.

<귀향>에서 크루즈를 통해 소피아 로렌을 환생시켰던 감독은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선 크루즈의 몸에 오드리 헵번을 불러들이는 마술을 선보인다. <귀향>이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과 페넬로페 크루즈의 협업을 기다려 온 관객이라면 주저 없이 극장으로 달려가길 권한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