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박신우 감독의 치밀한 추리구조 대신 감정을 전면에 내세워

"같은 게 아니라, 다른 걸 찾아야 한다.

작고 미묘한 다른 점이 사건의 모든 것이다." 미국의 추리수사 드라마 <넘버스>에서 들은 대사다. '카피캣(모방범죄)'을 수사할 때,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건과 원래의 사건 사이의 공통점을 찾으며 함몰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비슷하게 보이는 점이 많을수록, 숨겨진 다른 점을 찾아내야 사건의 전말을 확인할 수 있다.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를 볼 때도 같은 원칙이 필요한 것 같다.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볼 때, 많은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원작을 놓고,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잘 옮겼는지를 체크하며 영화를 보게 된다. 하지만 이건 '영화'를 본 게 아니라 '원작'을 복습하는 일에 불과하다.

원작과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매체가 다른 만큼 거의 모든 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다른 점이 실은 영화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최근 개봉한 박신우 감독의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은 잘 알려지다시피 일본 최고의 추리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많은 평들은 영화가 소설의 치밀한 추리구조를 살리지 못하고, 주인공들의 감정을 단순한 신파 멜로로 뭉뚱그린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비판은 일면 정당하다.

<백야행>이라는 영화를 소개할 때, 언제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장점은 치밀한 계산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타고난 수학자 같다. 어떤 원칙을 정해놓고, 흔들림 없이 그 원칙을 성실히 수행해나간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사건의 전말을 쉽게 눈치 채지 못하는 건, 그 성실성이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극한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극한의 성실성과 치밀함이 소설 <백야행>을 끌고나가는 힘이었다면, 영화 <백야행>을 끌고 나가는 힘은 극한의 '감정'이다. 현재의 사건과 과거의 사건을 교차시키며, 요한(고수)과 미호(손예진)의 얽힌 과거를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영화 전반부는 몰입도가 높지 않다.

소설이 3권에 걸쳐 쌓아놓은 긴 역사를 불과 20~30분 안에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때문에 영화는 미호와 요한의 어린 시절의 한 사건에 집중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모종의 관계, 그것도 꽤 무겁고 거대한 닻에 함께 매달려 있는 관계임을 암시하는 과정에서 '미스터리'라는 방법을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관객에게 "저 둘에게 어떤 사건이 벌어진 걸까"하는 궁금증을 유발시키기엔 너무 많은 정보를 흘리기 때문이다.

원작을 전혀 읽지 않은 관객이라도 아마 아빠의 살인사건엔 요한이 개입되어 있고, 엄마의 자살사건엔 지아(어린 시절의 미호)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

처음부터 '왜'에 대한 궁금증을 휘발시켜 버렸음에도, 젊은 형사나 승조의 비서실장 등에게 자꾸 '왜'를 파고들게 하는 탓에 그 두 사람의 에피소드는 영화 안으로 섞이지 못하고 계속 허공을 맴도는 것처럼 보인다.

다소 푸석푸석하던 영화를 찰지게 만드는 건, 요한과 미호의 감정이다. 언제나 인형처럼 웃던 미호가 수업시간 칠판에 쓰인 '살인자의 딸'이라는 낙서를 보고 화장실로 걸어 나가 무너질 때,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요한이 미호의 끔찍한 부탁을 듣고 잠시 무표정의 가면을 벗을 때, 앞서 여러 방법으로 궁금증을 유발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던 두 사람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

궁금증의 대상은 '사건'이 아니라 '감정'이다. 어떤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요한과 미호가 공범관계가 되었는지가 아니라 미호와 요한의 서로에 대한 감정은 대체 무엇이기에 저런 일을 벌이는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 지점이 바로 소설 <백야행>과 영화 <백야행>의 가장 다른 점이다. 영화 <백야행>은 미호와 요한의 감정을 '사랑'으로 규정한다.

미호의 사랑은 '자기애'이고, 요한의 사랑은 '희생'이다. 둘 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 사실을 확인시키는 장면이 있다. 미호가 강간당한 승조의 딸을 알몸으로 안아주며 "그 끔찍한 기억이 떠오를 때는 내 몸을 기억해"라고 말하는 신과 요한이 미호의 부탁을 처음으로 거역하는 횡단보도 신이다.

두 장면을 차례로 목격하면서, 관객들은 서서히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비록 범죄의 이유를 이해하고, 범죄 자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동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알겠지만, 그의 소설에 '동정'이라는 감정은 없다.

그는 치밀하게 '동의'를 구한다. '동정'은 영화 <백야행>이 새롭게 빚어낸 감정이다. 그 애처로움이 추리와 계산이 휘발된 이야기에 새로운 힘을 주입한다.

이런 힘은 소설 속 주인공의 이미지와 거의 99% 싱크로율을 보여주는 고수와 손예진의 공이 크다. 만약 원작을 읽은 관객이라면 고수와 손예진의 얼굴 위에 자연스레 원작의 긴 역사를 얹어가며 영화를 봤을 공산이 크다.

만약 영화로 처음 이야기를 접한 관객이라면, 이야기 자체에 대한 만족도보다는 두 배우의 에너지에 대한 만족도가 더 클 것이다.

사족일지도 모르지만, 영화를 보면서 의도된 것이 분명한 이 '신파'의 감성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긴 이야기를 짧은 시간 안에 무리하게 구겨넣기보다는 신파적인 감정을 증폭시켜 이야기를 따라오게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면 괜찮은 답이다. 하지만 한국 관객은 일단 울리고 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면, 신파는 약이 아니라 독이 될 공산이 크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