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최동훈 감독의 시추에이션은 좋았으나, 마찰이 줄면서 매력도 줄어

2009년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으로 손꼽히던 <전우치>의 봉인이 풀렸다. 흥행 성적으로 보자면 출발이 좋다. 시퍼런 외계 생명체들이 전국 900개의 스크린을 독식하며 황홀한 3D 신세계를 선보이는 가운데, 500년 만에 족자에서 풀려난 날라리 도사는 개봉 5일 만에 177만 명의 관객들의 눈을 홀렸다고 한다.

<전우치>의 이야기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와 도술로 요괴를 소탕하는 도사와 신선들이 살던 옛날 옛적에서 시작한다. 어리바리한 신선들의 실수로 요괴들이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을 손에 넣고 달아나는 사건이 벌어지고, 오랜 시간이 흘러 조선에 요괴가 출몰하기 시작한다. 세상으로 쫓겨난 신선들은 당대 최고의 도사로 소문난 화담(김윤석)을 찾아가 요괴 소탕을 부탁한다. 의술과 도술, 학식에 능해 조선 최고의 현자로 알려진 화담은 요괴를 잡으러 나서던 중, 말썽꾸러기 전우치(강동원), 초랭이(유해진) 짝패와 맞닥뜨린다.

도술 재주는 신묘하나 인격수양은 한참 덜 된 전우치는 '조선 최고의 도사'로 이름을 날리겠다며 왕을 골탕 먹이고, 유부녀를 보쌈하는 등 사고를 치기 일쑤다. 말썽꾼 전우치가 만파식적을 손에 넣었다는 걸 알게 된 화담과 신선들은 전우치의 스승이자 전설의 도사 천관대사(백윤식)를 만나 담판을 지으러 간다. 하지만 화담과 천관대사의 기싸움으로 만파식적은 두 동강 나고, 천관대사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스승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500년간 족자에 갇혔던 전우치와 초랭이는 다시 요괴가 출몰하기 시작한 2009년 서울 한 복판에 풀려난다.

최근 극장가에서 '쌍끌이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아바타>와 <전우치>는 같은 '블록버스터'지만 주요 무기가 다르다. <아바타>에 대한 기대가 '기술'에 있다면, <전우치>에 대한 기대는 '사람'에서 비롯된다. 듣기만 해도 신뢰가 생기는 이름이 천지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로 '흥행 기술'을 인정받은 최동훈 감독이 2년 동안 판을 짜고, 김윤석, 백윤식, 김병세, 유해진, 주진모, 김상호, 염정아 등 막강한 '최동훈 사단'이 진을 쳤다.

이 물샐 틈 없는 판에 눈에 장난기를 그렁그렁 담은 강동원이 내려앉았으니, 타짜식 표현으로 "알록달록 패가 예쁘"다. 게다가 주인공은 지금껏 한 번도 영화화된 적 없는 고전 소설의 히어로 전우치. 당대 도술 영웅으로 어깨를 겨루는 홍길동이 있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며 만날 비통한 홍길동에 비해, 주색잡기에 혹하는 천방지축 젊은 도사 전우치는 최근 유행하는 '안티 히어로'의 계보를 잇기에도 손색없다. 신선한 아이템을 공사할 제작비가 100억 원이니 '총알'도 든든하다. 이쯤 되면 <범죄의 재구성> 김 선생의 표현대로 "시추에이션이 좋"을 수밖에.

하지만 흥미로운 '시추에이션'은 영화의 전반부에서 그 매력이 거의 소진되고 만다. 무채색 한복을 스타일리시하게 레이어드하고, 삐뚜름하게 갓을 눌러쓴 악동 도사 전우치는 관객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이라는 배경 속에서 경쾌한 마찰을 일으킨다. 전우치가 하늘의 아들로 둔갑해 왕을 골탕 먹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전우치가 손가락을 퉁기며 장중한 국악을 '뽕짝' 스타일로 변주하고, "도사란 바람을 다스리고, 비를 내리며~"라고 도술을 자랑하는 장면은 전우치 캐릭터의 '가벼움'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한편 '도사들의 싸움'이라는 영화적 설정은 화담과 천관대사의 담판 장면으로 정점을 찍는다. <전우치>는 조선을 신기한 도술을 부리는 발랄한 도사가 뛰노는 익숙하고도 낯선 판타지의 세계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한다. 계속 조선을 배경으로 '도술 판타지'를 견고하게 확장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최동훈 감독은 도사와 요괴를 2009년 현대로 데리고 온다. 아마도 도술 판타지가 현대라는 배경과 만나 더욱 강렬한 마찰이 빚어지길 기대한 것 같다. 그러나 마찰의 에너지는 현대로 넘어오면서 급속히 떨어지고 만다.

문제는 도술 판타지와 현대라는 배경의 접점이 지극히 좁다는 데 있다. 워낙 기묘한 도술을 부리던 도사인지라, 500년의 간극 따윈 별로 신기해하지 않았던 걸까. 전우치는 순식간에 2009년 한국에 대한 적응을 마치면서, 현대와 도사가 부딪히는 시추에이션 극의 재미가 반감된다. "왕이 없으면 백성은 누가 먹이나?" "일찍이 백성을 위하는 관리를 본 적이 없다"는 한 두 마디 짧은 대사로 '갑자기 서울 한 복판에 떨어진 도사'라는 설정을 복기하긴 하지만, 미약할 뿐이다.

동시에 캐릭터들은 '투명인간'으로 전락한다. 아무도 그들을 못 보는 것 같다. 요괴와 도사가 도심 한 가운데서 둔갑술을 펼치며 싸울 때나, 영화 촬영장에서 싸울 때나 구경꾼은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 배경으로 일반 사람들을 사용하긴 하지만, 반응이 없다. 마찰이 사라진 현실은 영화 속 영화의 세트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나마 빛나는 인물들은 세 신선이다. 500년 넘게 각각 스님, 무속인, 신부님으로 '영혼계'와의 끈을 이어온 세 신선은 전우치와 화담 사이에서 동분서주하며 영화에 활력을 주려 애쓰지만, 이미 좁아진 판을 넓힐 만한 여력이 없다. 세 신선 외에도 배우들 각각의 연기는 대부분 매력적이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우아한 몸동작을 취하는 강동원도 '전우치' 캐릭터에 딱 맞고, 웃으면서 살인할 것 같은 서늘한 악인 화담은 김윤석을 통해 더욱 우아해졌다.

백윤식, 유해진, 염정아를 비롯해 요괴 선우선까지도 맡은 바를 소화한다. 이렇게 훌륭하고 풍성한 캐릭터가 바글바글 모여 있음에도 결국 영화가 얇은 외줄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없이 빈약한 이야기로 밖에 설명이 안 된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인물이 인경(임수정)이다. 그녀는 영화의 복선이자 이유이자 결과이지만 영화 내내 이야기 위를 둥둥 떠다닌다.

이런 '짠' 평가는 전작에서 촘촘한 이야기로 판을 짜 온 최동훈 감독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는 감독이 이야기의 큰 틀부터 대사의 추임새 한마디까지 모조리 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전우치>의 후반부는 뭉텅뭉텅 잘라진 조각을 이어붙인 느낌이다.



박혜은 영화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