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롭 마셜 감독의 최고 여배우들이 펼치는 환상적 무대, 눈 · 귀가 즐거워

춤과 노래 그리고 찬란한 여배우들. 롭 마셜의 뮤지컬 영화 <나인>은 이 세 단어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캐스팅이 발표되는 순간부터 <나인>을 향한 관객의 기대는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다들 거실 장식장에 오스카 트로피 하나씩은 갖고 있잖아요? 반응이 왜 그래요?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만 돼도 가문의 영광이라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처럼?"이라는 농담이 통할 법한 엄청난 배우진이 첫 번째 이유다.

<나의 왼발>과 <데어 윌 비 블러드>로 두 개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성 트로피를 보관하고 있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 <두 여인>으로 오스카를 거머쥔 전설의 여배우 소피아 로렌, <세익스피어 인 러브>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출연해 단 10신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가져간 주디 덴치, <디 아워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손에 넣은 '완벽한 미의 여신' 니콜 키드먼,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에서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의 팜므파탈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상납 받은 페넬로페 크루즈, <라 비앙 로즈>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환생"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가져간 프랑스의 거물 신예 마리온 코티아르, 오스카 트로피 대신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트로피로 아쉬움을 달랠 케이트 허드슨 그리고 오스카 트로피 대신 그래미 트로피로 장식장을 채웠을 '블랙 아이드 피스'의 보컬 퍼기까지.

이 눈부시다 못해, 눈이 멀 지경인 화려한 배우진을 한 편의 영화로 불러 모은 사람 역시 뮤지컬영화 <시카고>로 데뷔하자마자 아카데미 6개 부문을 싹쓸이 한 롭 마셜 감독이니 <나인>에 대한 기대가 뜨겁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 개봉 전부터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가 "할리우드 역사상 최고의 뮤지컬 탄생을 기다린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나인>은 과연 이름값을 할 만한가.

영화는 1960년대, 이탈리아의 한 영화 제작소에서 시작된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세트를 앞에 두고 영화감독 귀도 콘티니(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심기가 편치 않다.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감독을 부르는 '마에스트로'라는 호칭을 얻을 만큼 성공했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텅 빈 골방 같다.

이미 두 편의 전작을 '죽 쑤고' 잠시 쉴 겨를도 없이 제작사의 등쌀에 떠밀려 9번째 영화 <이탈리아>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 크랭크인 열흘을 남겨두고 최고의 배우, 최고의 스태프, 최고의 제작자, 최고의 세트가 준비된 지금, 없는 건 단 하나 시나리오다. 이야기한 그 '무엇'이 사라진 감독에겐 이 모든 완벽한 세트가 곧 지옥이다.

중압감을 참다 못해 제작 발표회장에서 도망친 귀도가 기댈 곳은 '뮤즈'들의 품이다. 예술의 열정을 일깨워 준 돌아가신 어머니(소피아 로렌)에게 응석을 부리고, 매력적이고 섹시한 정부 칼라(페넬로페 크루즈)를 은신처로 불러들여 질펀한 사랑을 나누고, 동시에 가정에 소홀한 자신을 사랑으로 감싸는 아내 루이사(마리온 코티아르)에게 마음의 안식을 구한다.

하지만 귀도가 걱정되어 찾아 온 루이사는 칼라와 마주하면서 상황이 꼬이고, 여기에 그에게 매료된 <보그>의 아름다운 에디터 스테파니(케이트 허드슨)까지 노골적인 유혹을 보내오면서 귀도의 은신처는 '뮤즈들의 아수라장'으로 변해간다. 결국 다시 로마로 돌아 온 귀도를 기다리는 건 여배우 클라우디아(니콜 키드만)과 루이사의 이별통보.

오랜 친구이자 정신적 지주인 디자이너 릴리(주디 덴치)의 조언도, 어린 시절 그의 성적 영감을 충만하게 채워줬던 사라기나(퍼기)의 판타지도 귀도를 돕지 못한다. 이야기가 사라진 감독은 그 자체가 환영이 되어 관객의 기억 너머로 사라질 뿐이다.

<나인>에서 귀도의 고민은 스토리가 아닌 도화선이다. 그의 고민이 영화의 방향을 결정짓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대신 귀도의 고민이 시작되면, 영화는 그 고민에 맞는 뮤즈들을 무대에 올린다. 무대가 주는 활기를 잊은 귀도를 위해 릴리는 파리의 성인 카바레 '폴리 베제레'의 화려함을 떠올리게 돕고, 의기소침한 귀도를 위해 칼라는 농염한 성적 판타지를 부추기는 식이다.

이미 식어버린 귀도의 마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루이사가 그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황량한 마음의 귀도가 어머니의 따스한 품을 꿈꾸고, 좌절한 귀도에게 아름다운 패션 에디터가 유혹의 눈길을 보내고, 귀도가 과거의 열정을 기억해내기 위해 농염한 사라기나를 떠올리고, 귀도의 영화 속 뮤즈였던 클라우디아가 그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모든 순간은 아름다운 여배우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뮤지컬 장면으로 치환된다.

귀도는 관객과 마찬가지로 입을 떡 벌리고 눈부시게 화려하고 열정적인 여배우들의 공연을 감상한다. 그렇게 한 막의 공연이 끝나면, 귀도는 또 다른 고민을 통해 다음 공연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때문에 관객들은 귀도의 고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저 어서 귀도의 응석이 끝나고 다음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릴 뿐이다.

롭 마셜 감독의 <나인>은 어쩔 수 없이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8과 1/2>과 뮤지컬 <나인>, 그리고 자신이 감독한 <시카고>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는 감독이 제 안의 판타지를 파고들어가는 몽환적 과정을 영화로 옮긴 펠리니 감독의 <8과 1/2>과 비교할 때, 영화 <나인>은 고민의 농도가 묽다. 사실 고민이라기보다 응석에 가깝기 때문에 관객이 동참할 여지가 없다.

뮤지컬 <나인>과 비교할 때는 어쩔 수없이 공연의 폭발력이 떨어진다. 물론 앞으로도 한 영화에선 절대 볼 수 없을 배우진의 춤과 노래는 환상적이지만, 무대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가 객석을 휘감는 공기를 스크린이 재현하기는 무리다. 마지막으로 <시카고>와 비교할 때 <나인>은 '전시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카고>의 뮤지컬 신은 인물의 대사이고, 복선이며, 심리묘사였지만 <나인>의 뮤지컬 신은 거의 부연설명에 그친다.

이야기를 잃은 영화감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인>은 실제로도 이야기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8과 1/2>의 밀도를, 뮤지컬 <나인>의 파괴력을, 영화 <시카고>의 탄탄함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다면 <나인>이 묽고 성긴 영화라고 생각할 법하다.

<나인>은 한 마디로 '118분의 불꽃놀이'다. 그 찰나의 화려한 아름다움은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기 부족함이 없다. 비록 불꽃놀이가 끝나면 텅 빈 하늘이 허탈하겠지만, 누구라도 불꽃놀이 구경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게다가 소피아 로렌, 주디 덴치, 니콜 키드만, 페넬로페 크루즈, 마리온 코티아르, 케이트 허드슨, 퍼기가 온 몸을 불살라 쏘아 올린 불꽃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박혜은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