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척, 멋있는 척서 무엇이 나다운 것인가 고민하는 중
그 많던 '싸나이'들은 다 어디로 갔나
"커피 값은 내가 내고! 쿠폰 도장 네가 찍냐!" "네가 찍냐 네가 찍냐! 열 개 모아 나도 먹자!"
머리에 적띠를 두른 남자들의 구호가 애처롭다.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쥔 이들의 투쟁 대상은 '여친님'. 이 남자들에게 정치 현안보다, 사회 쟁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팝콘 값을 누가 낼 것인가', '할증이 붙기 전에 택시를 탈 수 있을 것인가'다.
힘없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외치며 투쟁 구호를 외치는 <개그콘서트> '남보원(남성인권보장위원회)' 코너의 인기 배경에는 (특히 남성)시청자의 열렬한 공감이 있다. '찌질하다'는 말을 들을까봐, 여자친구에 대한 울분을 마음 속으로만 삭혀왔던 남자들은 황현희의 선창과 박성호의 탄식에 박수와 환호로 동참한다.
그동안 꽃미남의 시대는 여러 가지 파생종들을 낳았다. 2000년대 이후 잇따라 등장한 '메트로 섹슈얼', '위버 섹슈얼', '크로스 섹슈얼' 등이 그것이다. 최근엔 요리에 관심을 가지며 본격적으로 주방 생활을 즐기는 '개스트로 섹슈얼(Gastro Sexual)'도 등장하고 있다. 근육질의 몸매를 가지면서도 여성과 시크한 대화를 시도하는 온갖 '섹슈얼'들은 더 이상 군림하는 짐승이 아니었다. 수컷을 지운 남자들은 이후 '연하남'이 되어 스스로 여자친구의 펫(pet)이 되기도 하더니,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우엉남이 되기도 한다.
여성을 압도하는, 짐승 같은 카리스마 대신 이들이 선택한 것은 귀엽고 엉뚱하고 때로는 삐치기도 하는 '동생 같은' 매력이다. '안아줘야 할' 남자들의 잇따른 출몰은 여성들로 하여금 '안기고 싶은' 남자의 출현을 염원케 한다. 약한 남성과 강한 여성의 실재, 그리고 더 강한 남성이라는 판타지가 혼재하는 상황은 다시 '진짜 싸나이'를 부른다.
약한 남자의 종착역, 찌질남?
감성적인 꽃미남과 수컷성이 거세된 초식남을 아우르는 '약한 남자'의 오랜 독주에 질리기라도 하듯, 시대는 다시 '짐승남'을 호출했다. 신인그룹 2PM의 폭발적인 인기 뒤에는 근 10년 동안 꽃미남 콘셉트만 내세웠던 남성아이돌의 게으른 고집 대신 '짐승돌' 콘셉트를 내세운 차별화 전략이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발굴해낸 최고의 인기 캐릭터는 선덕여왕이나 미실이 아닌 짐승남 '비담'이었다. 최근 새로 시작한 수목드라마 <추노>도 수컷 냄새 가득한 짐승남들의 초콜릿 복근을 앞세워 인기몰이에 나선다.
최근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이런 변화된 남성상의 특색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제 스튜디오 안의 말쑥하고 정제된 인물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모습을 닮은 평범하고 찌질한 캐릭터들의 천태만상에 공감을 보낸다.
<천하무적 야구단>의 멤버들은 그 이름과는 달리 천하무적이 아니다. 늘 실수를 연발하다 파죽지세로 자멸하고 마는 이들의 경기는 실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같은 멤버들에게도 비난을 해대는 모래알 팀워크가 경기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밀도를 높이고, 뒤늦은 단합으로 거머쥔 최초의 승리는 '루저'들의 반란으로 시청자들의 가슴에 울림을 준다.
<무한도전>은 찌질남들이 모여 노는 운동회 중계쇼에 다름없다. 키 작고, 뚱뚱하고, 못생긴데다, 지식도 짧고 성품마저 좋지 않은 이들의 오랜 인기는 역시 친근감이다. 1인자에게는 열등감을 보이면서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는 거만한 2인자의 이중성은 인기의 핵심이다. 그동안 왠지 자리를 잡지 못했던 정준하도 쩌리짱(겉절이 캐릭터 중 최고)이라는 캐릭터로 드디어 시청자의 공감을 사며 자신의 찌질함을 매력적으로 어필하는 데 성공했다.
수십 년 동안 슈퍼맨 콤플렉스에 시달린 후에야 자신이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중장년 남성들은 숨겨왔던 '약한 남자'를 뒤늦게 마음껏 표현한다. <남자의 자격>의 인기는 '하자'가 있는 몇몇 중년남들의 실제 모습에 기반하고 있다. 전성기를 지나 사실상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김태원, 이경규, 김국진은 한때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속 좁고 허세만 부리는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잃어버린 꿈을 찾아 어설픈 실수를 연발하는 이들의 서툰 행보는 대중의 응원과 박수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