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명반·명곡] 심성락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2009년 트라이앵글뮤직 (上)'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한국판이라 해도 좋을 격조 높은 소리

뮤지션에게 있어 반 세기동안 음악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면 축복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장구한 세월동안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음반 녹음에 참여했지만 자신의 작품집을 한 번도 발표하지 못했다면 그보다 불행한 뮤지션은 없을 것이다.

여기 74세의 고령에야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첫 앨범을 발표한 연주자가 있다. '아코디언의 거장' 심성락이다. 그의 연주앨범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는 대중가요 사상 최고령 앨범이란 역사성과 더불어 그를 악사에서 아티스트로 거듭나게 한 감동적인 멜로디를 담아냈다.

사실 심성락의 아코디언 연주는 대중가요계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녹아있다.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가수들의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해 왔기 때문이다. 옛 대중가요를 좋아하는 대중이라면 60-70년대의 수많은 아코디언과 오르간 연주 '경음악집'에 참여한 그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지금 개념의 아티스트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그가 참여한 모든 음반이 가수의 세션이나 밤업소의 영업에 필요한 음반을 제작하기 위한 주문연주였기 때문이다. 그럼 점에서 이 앨범은 심성락의 진정한 첫 작품집이다.

좋은 음악에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은 무수하다. 노래의 뼈대라 할 수 있는 멜로디와 공감대를 안겨줄 가사를 창작하는 송라이팅 능력은 기본이다. 여기에다 노래를 근사하게 화장시키는 편곡 능력, 그리고 뛰어난 연주와 가창력의 중요성은 균등하다.

하지만 오직 노래하는 가수에게만 대중적 관심이 집중되는 우리 대중음악계의 일그러진 오랜 관행은 가수이외의 음악인들에 대한 평가에 왜곡된 환경을 강요해 왔다. 그 결과,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가수들과는 달리 연주인들은 탁월한 음악적 역량과 역할과는 상관없이 늘 대중의 관심 밖에 머무는 태생적 한계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폭넓은 대중이 기억하는 연주자는 색스폰 연주자인 길옥윤, 이봉조와 기타연주자인 함춘호, 이병우 정도가 고작이다.

아마도 젊은 세대들은 '아코디언'이란 악기조차 생소할 것이다. 그만큼 아코디언은 독자적으로 각광받기 보단 보조적인 악기로만 영역이 제한적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코디언 연주자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전무하다. 아코디언이 추억과 향수를 안겨주는 낡은 소리가 아닌 그 자체로 아름다운 소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아코디언은 바람을 담아야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다. 그런 점에서 앨범 타이틀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는 곧 그의 음악을 들으라는 이야기가 된다. 아코디언 소리는 애절한 선율 때문에 누구나 옛 추억을 떠올리는 마력을 발휘한다. 복고문화가 창궐한 2000년 이후 추억과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악기인 아코디언에 대한 수요는 급팽창하고 있다.

하지만 대중적 조명을 받지 못했기에 연주자들의 개체 수는 희박하고 특히 수준급 연주자는 극소수다. 가수 최백호는 "심성락 선생이 계시지 않으면 앞으로 누구에게 아코디언 연주를 부탁해야 될 지 걱정"이라고 말 할 정도다. 그의 대표곡 '낭만에 대하여'도 심성락의 아코디언 연주가 있었기에 복고문화의 최대 명품이 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심성락은 영화 <인어공주>, <봄날은 간다>, <효자동 이발사>와 같은 과거의 추억을 반추하는 복고풍 영화 OST에 참여해 섬세하고 탁월한 아코디언 연주로 자신의 연주능력을 재확인시켰다. 반세기가 넘는 그의 음악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은 노래하듯 드라마틱한 그의 아코디언 연주에 가치를 느낀 후배 음악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음반은 가장 상업적인 영화와 광고 음악가들이 기꺼이 제작비를 들였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악사가 아닌 아티스로 자신을 전면에 내세워준 그들과의 음반작업에서 느꼈을 심성락의 행복한 기운은 전 곡에 담겨 청자의 가슴으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OST음악이 주 레퍼토리로 구성된 이 음반은 사실 심성락 아코디언 연주의 최대 매력인 '뽕짝' 질감과는 간극이 있다. 하지만 늙은 쿠바 뮤지션들의 놀라운 음악성을 담아낸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한국판 버전이라 해도 좋을 격조 높은 감동의 소리를 담아냈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