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명반·명곡] 심성락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2009년 트라이앵글뮤직 (下)손가락 장애와 난청도 못말린 열정… 죽는 날까지 연주하고파

아코디언은 한국대중가요사와 궤를 함께 해 온 악기다.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했던 선배 아코디언 연주자들이 많았기에 심성락은 아코디언 연주자로는 2세대라 할 수 있다.

허경구, 노명석, 김광빈, 송운선, 김호길, 이재현, 황병렬, 김인배, 한호선 등은 국내에서는 개체수가 희귀한 아코디언 연주집을 발표했던 1세대 아코디언 연주자들이다. 심성락은 나서기를 싫어하고 여성처럼 섬세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녹음 때도 자신의 악기소리가 이유 없이 크게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특이한 스타일이다. 자신의 소리가 음악 완성도와 상관없이 부각되는 것보다 전체 음악의 밸런스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의 연주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그의 연주에 감동한 광고음악 감독인 강재덕의 제의로 제작되었다. 대중가요 사상 최고령 뮤지션의 앨범으로 기록된 이 앨범은 과거의 유산과 뿌리 찾기에 인색한 대중문화계에 희망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행복한 선물이다. 사실 심성락의 연주앨범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과거의 가요들을 연주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평생을 가요 세션 연주자로 살아온 그가 영화 음악 집단 M&FC의 조성우, 박기헌 음악 감독을 만나면서 2000년대 들어 '인어공주' '봄날은 간다' '효자동 이발사' 같은 영화음악을 연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앨범은 그가 단순히 뽕짝 연주자만이 아님을 확인시키는 현대적 감각의 영화OST 트랙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수록곡은 총 12곡. 첫 곡은 SK그룹 광고의 BGM로 사용된 영화 인어공주의 OST인 'My Mother Mermaid'다. 아코디언 연주의 탁월함은 물론 스트링 선율이 참 아름다운 곡이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부산시향과 특별공연까지 했던 영화 '봄날은 간다'의 OST인 'One Fine Spring Day'도 영화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아름다운 트랙이다. 세계적인 아코디언 연주자 '리샤드 갈리아노'와 함께 한 '꽃밭에서' 와 'Libertango'도 동서양 아코디언의 흥미로운 체험을 듬뿍 안겨준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OST인 '자전거' 또한 심성락 아코디언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이 앨범의 필청 트랙이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작곡한 백영호는 자신의 노래 녹음 때 심성락의 참여를 꺼렸다고 한다. 작곡자가 연주하면 멜로디를 훔친다고 의심했기 때문. 하지만 심성락은 한 평생 욕심 없고 음악이 좋아 음악과 더불어 살아온 연주자다. 괜한 의심이 싫었던 그는 연주자가 된 이후 작곡은 일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녹음한 인연으로 노태우 정부 때까지 대통령의 악사로도 활약했다.

사실 그는 뮤지션으로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잘려진 한쪽 새끼손가락과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난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래하듯이 연주하는 그의 담담한 아코디언 연주는 단숨에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끄는 현란함보단 편안한 산들바람처럼 청자에게 휴식을 안겨주는 미덕을 발휘한다. 공연보다는 녹음실 연주를 위주로 활동한 심성락은 오르간 연주에도 탁월한 뮤지션이다. 70년대 중반 대중음악계에 트렌드를 형성했던 무그음악은 이호준과 그를 통해 이미 70년대 초에 제시된 음악이었다.

심성락은 이번 앨범이 자신의 유작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 아코디언이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질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까지 연주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죽는 날까지 무대에서, 녹음실에서 연주하다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제 시작이기에 더욱 안타깝고 절절한 소망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앨범에 그의 장기인 '뽕필'의 질감이 빠진 점은 아쉽지만 현재의 트렌드를 반영하며 심성락 연주의 내공을 살린 제작자의 의도는 신선했다. 그 점이 바로 심성락을 악사가 아닌 연주자로 인식시키는 모티브를 제공했다. 탁월한 아코디언 연주자인 그가 한 평생 정당한 음악적 평가 없이 '악사'로만 대접받아오다 아티스트로 재인식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이 앨범의 가치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