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지붕뚫고 하이킥>해리 vs 신애 등 질투라인 소통과 연대 시작 될 수도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중 가장 억압되는 감정은 무엇일까.

아마도 마지막항목, '욕망'이 아닐까. 욕망 중에서도 가장 금기시되는 감정이 바로 질투인 것 같다.

질투는 마치 칠거지악이나 삼종지도처럼 어감이 매우 좋지 않은 단어 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부터 질투는 일단 '나쁜 것'이라고 각인되었다.

드라마 악역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드러나는 '악행'이 바로 착한 주인공에 대한 질투였다. 그래서인지 마음 놓고 누군가를 한껏 질투해본 기억이 없다.

누군가에 대한 질투를 느끼는 순간 뭔가 나쁜 짓을 하는 듯한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질투는 곧 '내가 열등하다'는 사실의 확인이라는 식의 감정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인터넷에 유행한 댓글 중에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칼이나 창 같은 뭔가 치명적인 무기가 가슴팍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 욕망의 핵심을 단 여덟 글자로 요약해 내다니.

그런데 그 말은 참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 세상에 부러움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부러움의 본질은, 질투의 본성은,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이 아닌가. 하느님조차도 인간의 불완전성이 가끔 부럽지 않을까. 0.1초도 불완전할 수 없는 신의 완전함은 얼마나 권태롭겠는가.

문제는 '질투'에 대한 우리의 감정교육이 지나치게 금욕적이라는 것이다. <지붕뚫고 하이킥> 속에서 서로에 대한 무한대의 질투로 잠 못이루며 각종 엽기 에피소드로 시청자들을 웃게 해주는 주인공들을 보라. 그들을 보며 나는 질투라는 감정이 반드시 억압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 때로 질투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의 의미는 '시기로 인해 생기는 미움'이라지만, 질투를 '오래, 제대로' 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아무'나 질투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질투에는 단순한 미움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선들이 복잡하게 꼬여든다는 것을. 누군가를 오랫동안 질투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한 엄청난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무엇보다 질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소중한 지식의 일종이다.

<하이킥>에서 애정전선 못지않게 재미있는 질투 라인, 특히 여자들끼리의 질투는 겉보기에는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는 그들에게 언젠가 불현듯 샘솟게 될 우정의 전조가 되고 있다. 해리 vs 신애, 세경 vs 정음, 자옥 vs 현경. 그들은 서로를 향한 끝없는 '질투'로 인해 어느 순간 의도치 않게 연대하는 질투의 커플이 되어 있었다.

특히 '해리 vs 신애'의 질투라인이 가장 귀엽고 흥미롭다. 아직은 아이들이라 질투를 잘 숨기지 못하고 질투에 온몸을 던져버리기 때문이다. 일단 신애는 해리네 집의 수많은 장난감과 동화책, 무엇보다도 해리네 집이 부자라는 것과 해리에게는 다섯 명이나 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부럽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언니 하나뿐인 신애는 해리가 '가진' 모든 것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이 게임은 처음에 해리의 완승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출발선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전세는 역전되어 해리에겐 없지만 신애에게는 있는 것 때문에 해리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신애는 일당백의 세경 언니가 있고 그 언니 하나만으로 다섯 명의 가족들이 부럽지 않아 보이는데다가 공부도 잘 하고 '줄리엔 말'까지 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해리와 신애 사이의 엄청난 질투는 결국 서로를 위한 소통과 치유의 무기가 된다. 해리는 신애의 창작동화 '아기똥 이야기' 덕분에 고질병이던 변비를 치료했고, 아무리 배워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뺄셈을 이해했다. 신애는 일기장 훔쳐보기 상습범인 해리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생일이 될 뻔 했던 10번째 생일을 태어나 가장 기쁜 생일로 바꿀 수 있었다.

세경 vs 정음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결핍을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정확히 반대로 반영하는 캐릭터다. 이것은 두 사람이 술에 취했을 때 절정에 다다르는데, 항상 웃음이 부족한 진지소녀 세경은 술이 한 번 들어가자 밤거리를 누비며 밤새도록 웃어대고, 항상 밝은 표정으로 다니던 정음은 단지 술이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마스카라 자국이 팬더처럼 되는 것도 모른 채 밤새 울어댄다. 세경은 정음의 자유분방함과 자신만만함을, 정음은 세경의 차분함과 진지함을 부러워하며 서로를 조금씩 이해해간다.

자옥 vs 현경의 에피소드는 더욱 요절복통이다. 아버지의 재혼이 마뜩찮은 현경의 눈에는 자옥의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지만 무엇보다도 현경이 억압하고 있는 감정은 태어나 한 번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독점하고 있는 자옥에 대한 질투다. 자옥 또한 자신이 가지지 못한 '바람직한 기럭지'를 지닌 현경이 부러운 나머지 그녀를 '거인'이라고 놀리며 온갖 수모를 당하지만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성적 질투의 미묘한 감정선, 그 클라이맥스가 바로 줄리엔 여친 사건이었다. 여성들은 불가능한 대상인 줄리엔을 자신의 마음 속 '보험'으로 생각한다. 정음과 인나는 남자 친구가 있으면서도 줄리엔의 호의와 도움을 늘 바라고, 현경도 남편이 있지만 아침운동할 때 줄리엔과 나란히 뛰며 뭇여성들의 부러움의 시선을 받는 것을 즐긴다.

자옥은 순재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줄리엔이 '매덤'이라고 불러주며 깍듯이 '여성'으로 대접해주는 것을 행복해 한다. 특히 신애는 줄리엔을 키다리 아저씨이자 미래의 남편감으로 생각한다. 줄리엔에게 여친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 마치 자기의 '믿는 구석'이 무너진 듯한 배신감을 느끼는 모든 여성들. 그러다가 줄리엔이 여친과 헤어졌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말로는 '안됐다'면서 모두들 입이 찢어져라 좋아하는 여성들의 이중적 표정은 정말 압권이었다.

질투는 그녀들의 내밀한 여성성을 확인시키는 동력이었던 것이다. 모두들 줄리엔과 연결될 가능성이 없으면서도 줄리엔의 여친에 대한 질투는 그녀들을 그 무엇보다도 '여자이게'했던 것이다. 이렇듯 질투는 우리의 싱싱한 여성성을 확인하는 바로미터이기도 한 셈이다.

질투에 대한 명언이나 속담을 찾아보니 질투의 좋은 점에 대해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질투를 다스려야 나의 자아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충언이 대부분이다. 질투를 일종의 심리적 질병으로 바라보거나 질투를 죄악으로 여겨 단죄하는 문장들로 그득하다. 위대한 사람들도 어지간히 질투 때문에 힘들었나 보다.

하지만 질투를 거세하라는 충언보다는 질투를 통해 삶의 열정을 발견하는 일이 더욱 흥미로운 건 왜일까. 질투는 타인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질투는 살아있다는 가장 뜨거운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런 질투도 느끼지 않는다면 무기력증이거나 영혼의 불감증이 아닐까. 질투를 억압하며 돌부처처럼 늙어가는 것보다는 마음껏 질투하면서 감성의 불감증을 치료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질투는 소통과 연대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질투는 내가 아직 가지지 못했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시작되니까. 질투는 악녀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질투하는 대상은 곧 우리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우리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되지 않을까. 차라리 마음껏 질투를 허하라. 내가 진정 부러운 것을 투명하게 알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언젠가는 조금씩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