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비게이션도 없고 목적지도 불투명한 여행이라면[시네마] 제이슨 라이트만 감독의 <인 디 에어>

지난 3월7일(현지 시간) 거행된 8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키워드는 '전복'과 '발굴'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초미의 관심사는 "과연 '전처의 역습'이 성공할까?"였다.

3D 신천지로 향하는 입구를 열어 준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이자 <하트 로커>를 포함해 줄곧 진한 액션 장르영화에 승부를 걸어 온 여장부 캐서린 비글로우의 정면 승부는 비글로우 감독의 K.O 승으로 막을 내렸다.

8개 부문 후보에 올라 알짜배기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 편집, 음향, 음향효과 등 6개 오스카를 싹쓸이한 <하트 로커> 앞에서 촬영, 미술상으로 겨우 체면치레를 한 <아바타>는 겸허히 패배를 인정했다.

관객 입장에서도 생애 처음으로 아카데미 후보에 올라 감독상을 수상한 탓에 예순의 나이에도 소녀처럼 행복해하던 비글로우의 풋풋한 수상소감이 카메론의 '왕자병' 수상소감보다는 감동적이었다.

네 번이나 후보에만 만족해야했던 제프 브리지스가 <크레이지 하트>로, 번듯한 상과는 별 인연이 없었던 산드라 블록이 <블라인드 사이드>로 오스카를 가져간 것도 일종의 '전복'이다. 유독 처음 오스카 후보에 올라 단박에 트로피를 거머쥔 수상자가 많다는 점은 아카데미가 신선한 발굴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제스처로 보이기도 했다.

올해 수상결과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럽지만, 작은 아쉬움이 하나 남는다. 제이슨 라이트만 감독의 <인 디 에어>가 두 명의 여우조연상 후보를 포함해 5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지만 박수만 신나게 치다가 빈손으로 집에 갔다는 점이다.

만약 작품상을 받았다면 아카데미 최초로 아버지와 아들이 오스카를 가져가는 진기록으로 남았을 텐데(공동제작자인 아이반 라이트만은 <고스트 바스터즈>의 감독이자 <인 디 에어>의 제이슨 라이트만 감독의 아버지다). 사실 작품상은 기대도 안했지만, 은근히 각색상 하나쯤은 <인 디 에어>가 가져가길 바랐다.

2년 전 오스카 각본상을 받은 <주노>도 제이슨 라이트만의 영화였다. 제이슨 라이트만 감독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재를 엮어 매끈하게 이야기를 꿰는 솜씨가 좋다.

첫 영화 <흡연, 감사합니다>에선 담배산업의 후원을 받으며 흡연 권하는 남자를, 두 번째 영화 <주노>에선 10대 미혼모를, 이번 영화 <인 디 에어>에선 관계를 두려워하는 해고통보 전문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자칫 비호감으로 손가락질 받을 법한 주인공들은 감독의 애정을 담뿍 받으며 결국 관객의 호감(최소한 인정)을 이끌어낸다.

<인 디 에어>의 주인공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는 최악의 경기 침체를 겪고 있는 미국에서 가장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그의 직업은 구조조정을 원하는 기업을 대신해 직원들에게 '인간적으로' 해고를 통보하는 일이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해고를 통보하는 일이 너무 바쁜 덕에 1년에 322일을 호텔과 비행기 안에서 보내야하는 루이스는 '인 디 에어(공중의)' 삶이 나쁘지 않다. 인생은 여행이고, 삶은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라고 생각하는 루이스는 관계, 책임감 따위의 무게에서 자유로운 '가벼운 삶'을 추구한다. 조금 외로우면 어떤가. 어차피 죽을 때는 누구나 혼자인 것을.

라이언의 잔잔한 삶은 한 떼의 여자들의 등장으로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첫 번째 여인은 공항 호텔에서 만나 첫 눈에 필이 통한 알렉스(베라 파미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라이언 못지않게 '공중의 삶'에 도가 큰 알렉스는 그녀의 표현대로 "거시기만 다른 라이언"이다.

부담 없이 외로움을 달래자는 알렉스의 제안은 아닌 척해도 외로운 중년 남성에게 위로와 활력을 선사한다. 또 다른 돌멩이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회생활에 첫 발을 내딛은 애송이 나탈리(안나 켄드릭)이다. 진보된 시스템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굳게 믿는 그녀는 원격 해고 시스템을 개발해 라이언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해고자를 직접 만나 "품격 있게 해고를 통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라이언과 달리 "최고의 효율성과 경제성"을 내세우는 나탈리는 사장의 신임을 받고, 그녀 탓에 라이언은 재택근무 신세로 전락할 위기다. 마지막 돌멩이는 라이언의 결혼 선물로 엉뚱한 사진을 찍어달라는 주문하는 막내 여동생이다.

"가족은 특히나 무거운 짐"이라 여기는 라이언이지만 평생 해 준 것 없는 여동생의 결혼선물을 모른 체 할 만큼 냉혈한은 못된다. 갑자기 매달린 관계의 짐을 그는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몸의 나이만 중년이지, 영혼의 나이는 철부지 열두 살 소년인 라이언의 공중부양 인생은 최대의 난기류에 봉착한다.

<인 디 에어>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화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평온하게 떠 있는 구름과 기하학 무늬로 포장한 듯 질서정연하게 정리된 도시의 전경은 현실 어디에도 발을 내딛지 않은 라이언의 눈에 비친 세상이다. 하지만 막상 도시에 내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라이언이 찾아가는 곳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원성과 분노와 좌절이 메아리친다.

제이슨 감독은 섣불리 라이언의 삶의 노선을 질타하지 않는다. 평생을 회사에 바쳤지만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팽개쳐지는 사람들을 만나는 라이언에게 '정착'이란 자본주의가 노동력을 강탈하기 위해 고안한 최적의 시스템에 불과하다. 언제 배신당할지도 모를 시스템을 '안정'이라 믿으며 거짓 위안을 삼느니, 아예 시스템에 귀속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삶이 건설적인지도 모른다.

한 치의 오차와 빈틈도 없이 최적화된 동선으로 공항을 누비는 라이언이 진정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편안하다'고 느끼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낌새는 그가 항공 마일리지를 모으는데 사력을 다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확실해진다. 우리가 큰 집, 좋은 가구, 아이, 연인, 승진 등에 정성을 쏟으며 나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발버둥 치듯, 라이언도 미국에서 7번째로 1천만 마일리지를 적립하는 최우수 고객이 되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그것은 신기루일 뿐이다.

<인 디 에어>는 시스템에서 끈이 잘린 해고자들과 처음으로 정착을 시도했다가 공중에 붕 떠버린 라이언을 함께 보여주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생이 내비게이션도 없고, 목적지도 불투명한 여행이라면, 당신은 어쩌시겠습니까?" 영화가 슬며시 운을 띄우긴 하지만, 그 답을 정하는 건 오롯이 관객 각자의 몫이다. 결론은 사뭇 우울하지만,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경쾌함을 잃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 반드시 혼자"라는 라이언의 말이 정답이라 할지라도, 살아가는 동안 우울해한 들 별반 달라질 게 없다는 감독의 위안 같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