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죽음을 사고 파는 문화… 죽어가는 자의 공포, 고독, 고통 먼저 살펴야

광고에게 영혼이 '습격' 당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

(영화 보며) 웃다가 죽을 지도 모릅니다. (영화 보며 여친에게 도둑 키스 하다가)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보던 중 옆에 앉은 관객의 '방귀냄새' 혐의를 대신 뒤집어쓰고) 억울해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진 무척 코믹한 광고였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며 중견 탤런트가 등장하여 호기롭게 외치는 목소리.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입니다!" 알고 보니 상조회사 광고였다.

상조 광고와 보험 광고를 비롯하여 인간의 '죽음'을 담보로 한 광고들이 날이 갈수록 가학적으로 변해가는 요즘이다. 홈쇼핑 보험 광고에서도 '자살 했을 경우에는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버젓이 황금시간대에 방영되고 있었다.

광고에서 '자살'이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쓰다니. '죽음'을 둘러싼 산업의 진화는 과연 어디까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게 될까.

내 사랑 내 곁에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죽음 관련 산업의 세련된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철을 탔다가 무척 낭만적인 광고 카피 한 구절을 발견했다. "보고 싶은 당신의 얼굴은 특별하지 않은 날에 더욱 자주 떠오릅니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고인의 존재를 더욱 가깝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상투적인 묘지 안장이 아니라 'XX메모리얼 파크'에 고인을 모시라는 광고였다.

혹시나 내 주변에 닥쳐올까 무섭고,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머나먼 죽음'이 아니라, 편안한 휴식 같은 죽음을 향유하라는 말인 것 같았다. 죽은 자보다는 살아남은 자를 위한 메모리얼 파크일테니 이제 죽음조차도 '레저 산업'의 일종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달콤한 휴식 같은 죽음, 친밀하면서도 우아한 죽음은 가능한 것일까.

"갑작스레 닥친 장례식. 슬픔에 앞서 예를 갖춰야 하기에 경황 없으셨죠?" 이 정도는 약과였던 셈이다. "장례는 현실입니다."라는 광고 카피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그 말은 곧 '뭐니뭐니 해도 장례는 역시 돈입니다'라는 협박으로 들렸던 것이다.

죽음을 상대하는 현대인의 태도가 한편에서는 점점 과격해지고 한편에서는 점점 우아해진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저 '우아한 죽음'을 위해서는 꽤 많은 화폐가 지출되어야 한다. '최고로 우아한 죽음'을 위해서는 더욱 더 비싼 죽음의 비용이 지불될 것이다.

비석의 색상과 디자인 뿐 아니라 비문까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의 DIY 산업은 일견 매우 참신하게도 보인다. 탁월한 입지와 울창한 수목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서 고인을 모시라는 어드바이스도 매우 솔깃하게 들린다. '아름답고 품위 있게'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배려는 필요하다는 생각도 동의한다.

굿바이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미묘한 거부감이 가시질 않는다. 왜 그럴까. 아름다운 조각 작품과 시원한 산책로와 멋진 자전거코스까지 풀코스로 갖추어진 메모리얼 파크. 정말 멋있을 것 같지만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다. 무엇일까. 죽음을 다루는 '형식'이 아무리 진화해도 죽음 자체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나는 산책하듯 나들이하듯 그렇게 편안한 기분으로 타인의 죽음을 향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죽음을 둘러싼 제의나 형식이 아무리 격조 높게 진화할지라도 죽음을 둘러싼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저녁 식사 후 산책을 하듯 평온하게 죽음에 대한 사색에 잠기는 일이 가능할까. 아마 그것은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고통의 해일이 몇 번이고 삶을 완전히 뒤집어버리고 나서야 가능해지지 않을까.

죽음에 관한 각종 이벤트와 애도의 형식은 나날이 진화해가지만 정작 죽음 자체는 어느 때보다 타자화되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사실 죽음 이전에, 죽음 자체보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죽음에 이르는 고독'이나 '죽음에 이르는 가난'이나 '죽음에 이르는 질병' 같은 것이 아닐까.

자연스럽고 편안한 죽음이란 거의 불가능하며, 평화로운 자연사는 쉽게 찾아볼 수 없고, 점점 죽음에 이르는 각종 위협들이 빈발하는 세상에서, 죽음 '이후'를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소수의 특권이 아닐까. 우리는 죽어가는 자의 공포, 죽어가는 자의 고독, 죽어가는 자의 고통은 외면한 채로 죽음 그 자체를 상업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시 중에서 박목월의 <하관>이라는 시가 있었다. 동생의 죽음 을 그린 시인의 목소리는 고통으로 인해 마비되어버린 심장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는 절창(絶唱)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자신의 가슴 속으로 동생의 관을 밧줄로 매달아 내리는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해서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축제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마지막 구절을 읽는 순간, 수업 시간이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정말 열매가 떨어지듯 '툭'하고, 예고 없는 눈물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떨어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죽음을 다루는 작품은 많았지만 이 시가 그토록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죽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의 죽음이나 배우자의 죽음은 문학 작품의 단골 주제이지만 동생의 죽음이란 흔치 않았다.

가상의 고통에 대한 예방접종이 전혀 안 되어 있던 상태에서 받은 충격이라 오랫동안 마음의 여진(餘震)이 가시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 '준비된 죽음'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죽음은 아무리 '학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실체라는 것, 그리하여 아무리 슬퍼해도 닿을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죽음을 다루는 현대인의 태도는 예전보다 분명 세련되고 우아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면에서 진화가 느린 나는, 죽음을 그저 촌스럽게 슬퍼하고 싶다. 죽음을 소비하는 형식이 아무리 진화할지라도, 죽음은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끔찍한 형용사를 다 동원해도 결코 다 담아내지 못할 고통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를 걱정하기에 앞서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죽어가는 자의 고통을, 죽어가는 자의 비명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