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조엘 & 에단 코언 감독의 <시리어스맨>증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삶의 불행에 대한 코엔 형제의 진지한 농담

할리우드의 특별한 재담꾼 코언 형제가 <시리어스 맨>으로 돌아왔다.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당신은 '코언 형제'의 영화를 '언제나' 좋아했던 관객인가? "그렇다"는 1번, "아니다"는 2번.

1번을 선택한 관객이라면 <시리어스 맨>은 '코언 형제표' 영화의 모든 장기를 버무린 걸작이라며 탄성을 지를 것이다.

만약 당신이 2번을 선택했다면? <시리어스 맨>을 보며, 가끔 코언 형제의 영화에 대해 "별로"라고 손사래치긴 했지만, 실은 자신이 '언제나' 그들의 영화를 좋아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2번이었다).

<시리어스 맨>은 코언 형제 영화의 매력이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기묘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나 장르의 틀을 깨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역동적인 불협화음 같은 '영화적 장치'가 아님을 천명하는 영화다. 돌이켜 보면 코언 형제 영화의 흡인력은 '매력'이라기보다 '마력'에 가깝다.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카메라가 비추는 곳에 절로 시선이 머물고, 하릴없는 잡담에도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드는 절묘한 연출만으로 세상의 모든 평범한 시공간은 드라마틱한 '영화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파고>의 끝도 없는 펼쳐진데다 무료하기까지 했던 설원, <아리조나 유괴사건>의 헐렁한 교외도시, <허드서커 대리인>의 닭장 같은 대기업 사무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의 침묵의 이발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퍼석하게 마른 황량한 사막이 코언 형제의 시선에 의해 얼마나 드라마틱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는지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번에 코언 형제의 눈에 들어 온 곳은 결속력강한 유대인 커뮤니티가 자리 잡고 있는 1960년대의 미드웨스트. 그들은 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유대인 중산층 커뮤니티를 혼돈과 불확실성의 토네이도 속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는다.

로렌스 고프닉(마이클 스터버그)은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평범한 가장이었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그는 다음 주면 염원하던 '종신교수 재직권'을 얻게 될 '예정'이고, 2주 후엔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예식 중 하나인 아들의 성인식을 뿌듯하게 지켜볼 '계획'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소한' 문제들이 있다.

아내와는 시큰둥한 관계가 된 지 오래고, 아들은 화장실에서 몰래 마리화나를 피우고, 딸은 코성형을 하겠다며 아빠의 지갑에서 잔돈을 훔치고, 무식한 옆집 남자가 슬그머니 정원을 침범해오고, 사회부적응자인 동생이 기약 없이 군식구로 눌러앉았고, 성적에 불만을 품은 학생이 귀찮게 구는 정도. 문제는 이 사소한 악재가 잠시 쉴 틈도 주지 않고 그에게 잽을 날린다는 사실이다.

아내는 갑자기 오랜 이웃과 바람이 났으니 어른스럽게 이혼하자며 일방적으로 통고를 날리고, 성적에 불만을 가진 학생은 뇌물을 던져놓고 사라지고, 동생은 불법 도박에 남창 호객행위로 경찰을 몰고 오고, 교수위원회에는 이름 없는 투서가 날아든다.

"반드시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고 믿는 과학자 로렌스는 도무지 이 상황들을 납득할 수가 없다. 그는 누구보다도 신중하고 예의 바르며, 결정적으로 이런 불행의 원인이 될 만한 "어떤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세 명의 현명한 랍비를 찾아가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듣고자 한다.

어느 정도 예상했겠지만, 코언 형제는 속 시원하게 로렌스의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답은 고사하고, <시리어스 맨>은 지독하게 모호한 말장난으로 로렌스를 포함한 관객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내가 모른다고 거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할 근거는 대략적으로 존재한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관객을 대신해 로렌스가 소리친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죠?"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끊임없이 말을 빙빙 돌려대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난데없이 출몰하는 죽음의 공포에 치이면서 로렌스와 함께 현기증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도가 트인다.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조금 더 풀어보자면, 누군가에게 모든 것이, 누군가에겐 아무 것도 아니다. <시리어스 맨>은 이 답에 대한 힌트를 두 번 제공한다. 첫 번째는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생뚱 맞은 기묘한 이야기다. 한 남자가 아내에게 방금 전에 친절하고 현명한 랍비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내는 그 랍비가 3년 전에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 앞에 (아내에겐) 죽은 자인 동시에 (남편에겐) 산 자인 랍비가 모습을 드러낸다. 랍비는 소문이 잘못됐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악령이라고 굳게 믿는 아내는 그의 심장을 얼음송곳으로 찌른다. 피를 흘리는 랍비는 웃으며 집 밖으로 사라진다. 남편은 "아내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괴로워하고, 아내는 "악령을 퇴치했다"고 후련해한다.

두 번째 힌트는 로렌스가 칠판 가득 완성한 어떤 공식이다. 그에게 모든 수식들은 각기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식을 모르는 이들에겐 아무 의미 없는 낙서에 불과할 뿐이다. <시리어스 맨>은 이야기한다. 삶은 수학공식 같은 '의미의 합'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정하고 예견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삶은 저 멀리서 불어 닥치는 토네이도를 보지 못하고 떠나는 피크닉이다. 철학자들은 이 두려움의 실체를 '부조리'라 이름 붙였다.

코언 형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남자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를 속에서 '인생'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부조리가 '매직아이'처럼 둥실 떠오르도록 만든다. 그들이 지금까지 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다만 전작에서는 그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핵심적인 사건을 도구로 활용했다면, <시리어스 맨>에서는 그 어떤 도구도 없이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상황을 연결하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주저 없이 '걸작'이라 부를 만하다. 현기증 나도록 유려한 부조리의 한복판에 설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 혼돈의 실체가 궁금하다면 <시리어스맨>의 초대에 응하길 적극 권한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