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한 여인의 처절한 몰락 그 속에 뜻밖의 유머와 '보이지 않는 포토존'

이른바 '모범생' 혹은 '모범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결핍되기 쉬운 정서는 무엇일까. 아마도 '허영'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우리는 암암리에 허영의 자매는 '사치'이고 허영의 딸은 '몰락'이라는 '결론'을 미리부터 학습해 온 것은 아닐까. 허영은 가정 교육에서나 학교 교육에서나 가장 경계하는 감정 중 하나다.

그리하여 허영은 사회화 과정 속에서 가장 '저개발'된 감정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허영이라는 감정의 씨앗은 누구에게나 마음 깊은 곳에 튼실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허영이라는 씨앗이 틔워내는 꽃이나 열매의 모습이 저마다 다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허영의 결과에만 주목할 뿐 허영의 기원이나 본질에 대해서는 침묵하곤 한다. 허영은 정말 그토록 경계해야만 할 감정일까.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의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고 난 후 나는 계속 이런 질문들을 마음속에서 던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 연극은 내 마음 속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허영이라는 본능을 일깨웠다.

오랫동안 억압된 허영이라는 감정의 배후에는 '몰락'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허영은 자신의 이미지를 자신의 존재보다 부풀리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허영이 자라나는 마음의 토양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만일 수도 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순수한 사랑일 수도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배종옥이 공들여 빚어낸 블랑시는 허영이라는 감정이 시작된 가장 순수한 기원까지 과감하게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가 연기한 블랑시는 허영이 지닌 불가해한 매혹을, 허영 저편에 숨겨진 절망과 순수를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그려낸다.

배종옥이 치밀하게 해석하고 재창조해낸 블랑시는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속의 블랑시(비비안 리)보다 훨씬 지적이고, 용감하며, 사랑스럽다. 그리하여 그녀의 예정된 몰락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은 더욱 쓰라리다.

만약 인생의 클라이막스가 사춘기에 이미 끝나버렸다면 어떨까.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깨달아버린다면, 과연 '과거보다 결코 아름다울 리가 없는 미래'를 향해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가장 아름다운 세계가 과거에 이미 끝나버렸다면, 우리는 과연 그저 과거를 추억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현실을 인정할 수 있을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고 난 후 나는 한동안 내 자신을 향해 그런 질문을 던지며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그리하여 내가 한때 모범생(?)이라고 믿었던 이십대 초반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블랑시의 절규를 이제는 너무도 절실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사실주의는 싫어요! 난 마법을 원해요!" "마분지 바다를 항해하는 종이 달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나를 믿어주신다면, 그건 가짜가 아니랍니다."

너무 일찍, 완전한 아름다움의 이상향을 발견해버린 사람에게는 오히려 인생의 선택지가 좁아진다. 그것은 '앎' 자체의 위험이기도 하다. 최상의 아름다움을 알아버린 인간은 그 이외의 모든 '어설픈' 자극들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이상에 결코 미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권태와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웬만한 대체제로는 그 아름다움의 기준을 절대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시 또한 그런 캐릭터다. 그녀에게 아름답고 찬란했던 모든 것은 어린 시절 그녀의 가족들이 모두 함께 살았던 대저택 '벨 리브'에서만 존재했다.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던 남편의 죽음 이후로 그녀에겐 더 이상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만 울리는 마음의 종소리가 울리지 않는다. 심각한 신경쇠약 증상을 보이는 그녀는 '더럽혀진' 자신을 끊임없이 정화하고 싶은 마음에 병적으로 '목욕'에 집착한다. 기억의 창고에서 지우고 싶은 그 모든 치욕스러운 과거를,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모두 다 깨끗하게 씻어내고 싶다.

블랑시는 현실의 잔혹함을 조금이라도 은폐하기 위해 초라한 전등에 색종이로 만든 갓을 씌우고 동생 스텔라 부부의 집안을 예쁜 천으로 장식하지만 그러한 단말마의 노력조차도 지독한 현실주의자이자 전형적인 마초 남성 스탠리에게는 '터무니 없는 허영'으로 보인다. "당신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것 말곤 아무 것도 없어!" "당신은 여기 와서 집안에다 분가루랑 향수를 뿌려 대고 전구에다 종이 등을 씌웠지.

자, 보시라. 집은 이집트로 변했고 당신은 나일 강의 여왕이 되셨다 이거지!" 스탠리가 그토록 잔인하게 일깨우지 않아도 블랑시는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벨 리브'를 그 어느 곳에서도 재생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인식하고 있다. 그녀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던 시절 사랑했던 소년과의 첫사랑 또한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낯선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만이 내 텅 빈 가슴을 채울 수 있는 전부인 것 같았어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보호받으려 했던 것은 공포, 공포 때문이었죠."

그녀의 드넓은 교양과 예술에 대한 높은 감식안도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그녀의 동생 스텔라 같은 여인이 훨씬 잘 살아남는다. 아마 스탠리와 스텔라는 중년 이상이 되면 어느 정도 자수성가한 중산층이 되어 자신들의 스노비즘을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치장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춘기 소녀의 감수성에서 영원히 시간이 멈춰버린 블랑시에게는 여동생 스텔라의 놀라운 현실 적응과 자신을 향한 스탠리의 노골적인 경멸이 놀랍기만 하다. 몰락한 가문의 실직한 낭만주의자 블랑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오히려 그녀의 고귀한 혈통과 드높은 교양과 예술적 감식안은 그녀의 '초라한 현실'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이런 주인공이 한없이 우울한 캐릭터에 그친다면 관객은 그녀를 연민할 수는 있지만 그녀를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연극이 매혹적인 이유는 누가 봐도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캐릭터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앵글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한 여인의 처절한 몰락을 그리는 이 연극은 곳곳에서 뜻밖의 애잔한 유머를 발휘하여 관객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한 한 여배우를 향한 관객의 조용한 열광을 충분히 곱씹을 수 있도록 무대 곳곳에 친절하게 '보이지 않는 포토존(photo zone)'을 설치해 놓기도 했다. 우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인증샷'을 포착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누르고, 아주 얌전하게 저마다 마음속의 카메라로 그녀의 멋진 연기를 한 컷 한 컷 촬영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토해낸 가슴 시린 고백은 우리 마음 속에서 영원히 리플레이 될 또 하나의 명대사로 각인되었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저는 항상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하며 살아왔어요……."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