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남자의 자격>'죽기전에 꼭 한번 해봐야 할 일' 도전, 성공보다 실패와 고생에 감동

꽃미남, 훈남, 완소남, 초식남, 짐승남, 품절남, 찌질남 등등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각종 '남자의 유형' 들. 이 다양한 명칭들에서 볼 수 있듯이 점점 '남자다움'의 자격 요건이 엄격해지고 세분화되어가고 있다.

지난 날 여성들에게 요구했던 수많은 자격 요건들이 요새는 남성들에게도 거의 비슷한 강도로 요구되고 있다. '열쇠가 몇 개인가'를 따지던 시대는 훌쩍 지나고 이제는 남성들에게도 당당히(?) 수려한 외모와 '바람직한 기럭지'는 물론 초콜렛 복근까지 요구한다.

다이어트와 피부관리는 더이상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남성들에게도 커다란 스트레스가 되어가고 있다. '여성 육체의 대상화'가 문제가 되던 시대를 지나 이제 '남성 육체의 대상화'도 함께 문제가 되어간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정말 여성들의 행복을, 남성들의 행복을 보장해줄까. 이런 복잡한 요건들을 모두 갖추면 진정 멋진 남자의 반열에 들 수 있을까. 우리는 저런 장난스러우면서도 명백히 폭력적인 신조어 만들기 놀이에 지나치게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평균 연령 40. 6세의 남자들이 만들어가는 버라이어티쇼 <남자의 자격>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남성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이른바 '꽃미남'이나 '완소남'이라는 식으로 바람직한 남성상을 날조해가는 우리 사회의 남성 길들이기 전략은 다분히 허구적이다.

그런 기준에 모두 부합하는 남성상을 찾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이 과연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매력적일지도 의문이다. <남자의 자격>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1박 2일>의 출연자들처럼 젊고 활기차지도 않고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처럼 '자타공인 이 시대의 셀러브리티'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시청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편안하고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은 <남자의 자격>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한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저마다 안고 있는 인생의 문제와 힘겹게 씨름하며 인생의 자잘한 보람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시대의 보통 남자들과 가장 많이 닮았다.

그들은 아무리 대단한 호시절을 보냈더라도 지금은 어딘가 조금씩 '마이너리티'의 냄새를 살짝 풍긴다. 바로 이 점이 시청자로 하여금 <남자의 자격>을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 방송된 '남자의 자격증' 따기 미션은 평생 연예인으로 살아온 이들에게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과제였다. 온갖 산전수전 다 겪어온 고생담까지 온국민에게 다 소문난 이경규는 제빵기술에 도전하고, '국민약골' 이윤석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육체 노동인 도배 기술에 도전하고, '20년째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사연 많은 남자 김국진은 POP 글씨쓰기에 도전한다.

20년 동안 하루도 술마시기를 거르지 않다가 간신히 술을 끊은 지 몇 달 안 된 '국민할매' 김태원은 생전 처음 보는 '알 공예'에 도전하고, 데뷔 십여년 만에 처음으로 '신인상'을 받은 예능 늦깎이 탤런트 김성민은 크레인을 운전하는 중장비 기술자에 도전하며, '비주얼 덩어리'라는 극찬과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탤런트 이정진은 수화통역에 도전하고, 지난번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며 '국민요정 정경미'를 처음으로 당당하게 부른 개그맨 윤형민은 뜨개질 공예에 도전한다.

이들 모두는 저마다 힘겨운 도전 속에 뜻밖의 보람을 느끼며, 정말 '먹고 살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불사하는' 이 땅의 가장들이 느끼는 회한과 노동 자체의 순수한 기쁨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도전이 '체험 삶의 현장' 식의 일회적 생색내기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들이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개월 이상의 수업에 직접 참여해야 하고, 국가공인 자격증 시험에 붙는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다.

알공예에 집중하느라 담배피우는 것도 잊어버린 채 열심히 메추리알에 아내의 얼굴을 그리던 김태원의 눈빛은 자못 진지했고, 20년 동안 몸에 배인 '술과의 싸움' 때문에 걸린 수전증을 이겨내고 유학중인 딸을 위해 아름다운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기러기 아빠 김태원의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었다.

손에 부상까지 입어가며 힘겹게 도배를 하는 이윤석도, 글씨 쓰고 테두리 만들고 반짝이 가루 뿌려대느라 손에 쥐가 나도록 용을 쓰는 김국진도, 낚시할 때 떡밥 반죽하던 솜씨로 제빵 기술에 도전하며 누군가를 '먹이는 기쁨'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경규도, 모두 하나같이 전에 없던 새로운 매력을 뿜어냈다.

그들이 각자 '보통사람들'의 힘겨운 육체노동을 겪는 모습은 그들을 단지 TV화면 속에서 편집되고 각색된 '연예인'이 아니라 '진짜 우리 곁의 살아있는 인간'으로 보이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자격증을 따기 위해 저마다 분투하는 그들의 모습은 연예인을 넘어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빠, 온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 데는 그가 초식남이라는 것도 짐승남이라는 것도 꽃미남이라는 것도 품절남이라는 것도 중요치 않다.

누군가의 의식주를 책임진다는 것, 그것은 힘겨운 노동의 고통과 징그러운 상사의 눈치를 이겨내는 유일한 힘의 원천이 된다. 왕년의 청춘스타들도 이제는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 가장이 되어 '생존 개그'를 불사해야 하고, 결코 가족에게조차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건강 검진 모습까지 온국민에게 공개해야 한다.

이경규가 <남자의 자격>을 위해 엄동설한에 마라톤경기까지 나갔다는 말을 듣자 강호동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생존 개그'의 본질을 꿰뚫는 촌철살인의 멘트를 날린다. "형님, 진짜 급하긴 급하셨나봐요. 원래 형님은 4시간 이상 촬영 안 하는데. 절대 그런 거 하실 분이 아닌데." 아무리 허접해 보이고, 모양 빠지고, 스타일 구겨지더라도, 이들은 모두 주어진 미션을 통과해야 한다. 시청자들은 그들의 '성공'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처절한 실패, 혹은 그들이 끝내 성공하기까지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생'에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저마다 파란만장한 라이프스토리를 가진 이 멤버들이 펼치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해봐야 할 남자의 할 일'로 구성되는 <남자의 자격>. 더 이상 '젊다'는 것만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도 없고, '인생행로가 이미 결정되었다고' 말하기에도 이른 나이, 평균연령 40.6세. 시청자들은 이들의 화려한 현재가 아니라 진솔한 실패담으로 가슴 찡한 감동을 경험한다.

예전에는 '특히' 여자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었지만, 지금은 어느새 남녀 공히 거의 평등하게(?)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여자의 자격 뿐 아니라 남자의 자격을 갖추는 것도 함께 어려워진 시대.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져도 이제는 저출산을 걱정해야 하는 세상.

옛날처럼 '남 vs 여'로 갈려 페미니즘과 마초이즘의 대결이 일어나는 시대도 가버린 지 오래다. <남자의 자격>을 보며 우리 여자들이 느끼는 '남자의 안쓰러움'은 이제 우리가 정말 '대화'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문화적 신호탄처럼 느껴진다. 여자들의 모든 고민을 24시간 서로 상담하고 공유할 수 있는 '미즈넷'처럼, 남자들의 고민과 여자들의 고민이 함께 만나는 또 다른 '하소연의 아고라'가 필요하지 않을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