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신데렐라언니>혈연이 아니더라도 조건 없는 다양한 사랑의 방식 필요한 건 아닌지

언제부터인가 '가족의 해체'라는 어구가 심심찮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초소형 가족이나 대안 가족의 등장, 가부장의 사회적 권위 하락 등 다양한 현상들이 '가족의 해체'를 암시하는 징후로 지목되었다.

분명 가부장에게 모든 권리와 의무가 집중되는 과거의 가족 관계는 현실적으로 효력을 잃었고 정당성도 약해졌다. 하지만 '기존의 가족 구조가 변화한다'는 것이 곧바로 가족 관계 자체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가족은 해체되어야 마땅한 것인가, 혹은 가족은 해체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굳이 혈연으로 묶이지 않더라도 '가족 같은 관계'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은 시대착오적인가. '현실의 가족'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멀어져 갈수록 '이상적 가족'의 환상이 증폭된다면, 그것을 과연 '가족의 해체'라 단언할 수 있을까.

가족의 위기가 심화될수록 '행복한 가족'에 대한 은밀한 환상이 커지는 것은 비단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는 '가족'이라는 심리적 건축물의 심각한 균열을 저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가족 아닌 가족'의 이야기로 비친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아버지를 가져 본 적 없는 은조(문근영)는 이 세상 모든 아버지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항상 이 남자의 등짝에서 저 남자의 등짝으로 옮겨갈 뿐인 엄마 송강숙(이미숙)의 몰염치를 증오하며, 엄마만 자신을 버려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던 은조. 그녀에게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아빠, 비현실적으로 착한 아빠가 생겼다.

대성참도가의 구대성 사장(김갑수)은 외동딸 효선(서우)이 친엄마처럼 따르는 낯선 여인 송강숙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녀를 처음으로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로 살게 해준다. '뜯어먹을 게 많아서' 남편을 좋아하는 송강숙, 부자 남편의 '본처'로 혼인신고를 하는 것이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보다 중요했던 송강숙의 속내를 알면서도, 구대성은 아내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한다.

죽은 엄마의 빈자리를 애타게 그리던 효선은 새엄마와 새언니가 한꺼번에 생기자 첫눈에 반해 그녀들에게 간도 쓸개도 다 내 줄 판이다. 이렇게 그들의 불안한 동거는 시작된다.

흥미롭게도 이 가족은 단지 싱글맘과 싱글파파의 재혼가정이 아니라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보다 더 가까운' 다채로운 인연들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구대성의 친구이자 구대성의 대성참도가를 노리는 홍회장의 아들인 홍기훈(천정명), 송강숙의 옛 남자 장씨가 데려다 키우던 아들 한정우(옥택연). 이들은 이 가족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지만, 은조와 효선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오랜 가족처럼 한 공간에 살아간다.

대성참도가에서 수십 년 동안 최고의 탁주를 만들어오던 수많은 일꾼과 도우미 아주머니들도 효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따스한 '또 하나의 가족'이다. 날마다 향기로운 술이 익어가는 대성참도가의 아름다운 한옥은 가족의 전통적 의미가 해체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그리워하던 '가족의 노스탤지아'를 구현하는 상상의 건축물처럼 보인다.

수많은 의붓아버지들의 폭력과 욕설과 협박에 길들여진 은조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었다. 세상은 오직 '뜯어먹는 자'와 '뜯어 먹히는 자'로만 나뉜다고 믿었던 은조에게는, 아무에게나 콸콸 샘솟는 애정을 덜컥 덜컥 퍼주는 효선의 어처구니없는 사랑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한 번도 아버지의 사랑 '따위'는 받아본 적이 없는 은조는 '나에게 기대도 좋다'고 말하는 새아빠의 젖은 눈에서 진심을 읽어내고 더욱 당황한다.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구대성에게, "내가 뜯어 먹히는 게 지금 나한테 네 엄마랑 네가 없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말하는 새아빠에게, 은조는 비로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게다가 효선이란 아이의 든든한 수호천사처럼 보이는 홍기훈의 미소는 겹겹이 닫혀 있던 은조의 마음을 무장해체시킨다. 은조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침에 눈 뜨는 것이 좋아졌다. 하지만 도를 넘어서는 엄마의 탐욕과 기막힌 거짓말 퍼레이드가 결국 아버지에게 '뜯어먹을 것이 많아서'였음을 알게 된 은조는 간신히 부여잡은 이 눈부신 행복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예감한다.

아버지의 사랑에 목마른 은조와 어머니의 사랑에 기갈 들린 효선. 한 번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은조는 뜻밖에 찾아온 너무 큰 사랑에 당황하고, 애교와 어리광으로 똘똘 뭉쳐 아무에게도 버림받아 본 적 없는 효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많은 가족들의 시선의 사각지대에 노출된 자신을 발견한다. "모두다 소풍을 갔다. 나만 빼고, 나만 빼고, 나만 빼고……." 효선은 그토록 갈구했던 '완전한 가족'이 생겼는데 이상하게도 더욱 외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효선이 독점했던 아버지의 사랑은 새엄마, 새언니, 심지어 새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 준수와 공유해야 한다. 그렇게 효선은 더 많은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이 더 많이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가족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가족이란 단어에 담긴 모든 환상을 깡그리 부정했던 은조에게는 진정한 가족이 생겼고, 가족의 사랑이 물처럼 공기처럼 당연한 나머지 한 번도 가족의 환상을 의심한 적 없던 효선은 가족의 처절한 결핍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구대성이 사망하자 은조와 강숙은 비로소 자신들이 8년 동안 누렸던 조건 없는 사랑의 눈물겨운 실체를 깨닫는다. 아내의 불륜까지 8년 동안 눈감아준 구대성의 거대한 사랑 앞에, 은조와 강숙은 마침내 무너진다. 가족의 사랑을 철저히 부정했던 은조와 가족의 실용성에만 소름끼치게 집착했던 강숙.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미 공황상태에 빠진 효선은 새엄마의 오랜 불륜을 알아차리고 만다. 그러나 효선은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새엄마마저 잃고 싶지 않다. 새엄마에 대한 증오보다 지난 8년간 키워온 사랑이 더 컸던 효선은 친딸 은조보다 더 친딸처럼 강숙에게 매달린다. 강숙이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가출하자 효선은 또 한 번 무너진 가족을 일으켜세우기 위해, 떠남보다 더 강력한 기다림의 축제를 시작한다.

효선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엄마가 돌아올 거라고 믿기 시작한다. 엄마아빠가 일군 사랑의 증거, 동생 준수가 있으니 엄마는 꼭 돌아올 거라고. 새어머니 강숙이 살뜰히 '딴 주머니'를 차던 8년 동안, 철없던 딸 효선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우리'가 반드시 함께 해야 하는 이유를 날마다 생각해내고 있었다.

아무리 1인 가족이 늘어나더라도, 출산을 기피하고 결혼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계속 증가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속에 그려진 행복한 미래상이 '단란한 가족'의 이상향이라면, 사람들이 '가족'에 기대하는 가치는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지 않을까. 현실의 가족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족의 이상향이 있는 한, '가족의 해체'라는 진단은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

가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심리적 만족감의 대체재가 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너무 빨리 가족 이후의 세계를 상상해내기를 강요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족은 해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재조립되고 재가공되고 재조명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혈연으로 얽히지 않았을지라도 서로에게 언니가 되고 동생이 되고 누나가 되고 오빠가 될 수 있는, 조건 없는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남녀간의 낭만적 사랑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누구나 엄마와 아빠는 물론 언니와 누나와 동생과 형이 되어보는 '감정 연습'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가족주의'는 분명 넘어서야 할 장벽이지만 '가족의 재구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절실한 화두가 아닌지.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