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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센 상대를 고른 죄

[시네마]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
원작에는 없는 새 인물 재기발랄하지만, 순애보는 턱없이 밀려
서양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면, 한국엔 춘향전이 있다. 아니 한국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몰라도 '춘향전'을 모르는 이는 없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이 작자 미상의 이야기는 판소리,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뮤지컬, 오페라, 발레 그리고 교과서까지, 거의 모든 매체를 통해 퍼져왔다.

열여섯 이팔청춘의 뜨거운 사랑이 신분과 악인의 방해를 뛰어넘어 결국은 맺어진다는 해피엔딩, 거의 완벽한 기승전결 구조와 군데군데 흥을 더하는 유머, 스펙터클한 클라이맥스, 권선징악의 엔딩, 도도하고 당찬 춘향의 캐릭터까지, <춘향전>은 잘 만든 이야기의 정수라 할 만하다. 이 '러브스토리 교과서'에 김대우 감독이 도전장을 냈다.

제목 하여 <방자전>. 이몽룡의 '메신저' 역할을 하며 신분 맞는 향단과 눈이 맞던 방자는 없다. 남원 최고의 '엔터테이너' 춘향을 두고 감히 주인 몽룡과 경쟁하는 훤칠하게 잘생긴 방자(김주혁)가 주인공이다.

정절녀 춘향 대신 제 미모와 청춘을 "최대한 비싸게 팔기"위해 "덫을 놓을" 줄 아는 책략가 춘향(조여정)이 있고, 로맨티스트 몽룡 대신 출세를 위해 음험한 계획을 세우는 "도통 속을 모르겠는" 몽룡(류승범)이 있다. 김대우 감독은 '미담 춘향전'을 비틀고 싶었던 것 같다. 원래 '미담'이란 듣기 좋은 부분은 부풀리고, 모난 부분은 깎아내서 전해지는 것이다. 김대우 감독은 부풀리고 깎이기 전의 '원본 춘향전'을 상상한다.

제가 예쁜 줄 아는 여자의 여우짓, 신분과는 별개로 최고의 여자를 얻고 싶은 남자의 욕망,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계산적인 연애가 넘실대는 진짜 세계. 이런 의미에서 <방자전>은 <춘향전>이라는 뼈대에 덧씌워진 발칙한 상상이라기보다는, 미담의 달콤함을 걷어낸 붉은 속살에 가깝다.

<방자전>은 한양 장안의 이름난 건달 '이서방' 방자가 장안 최고의 통속소설가(공형진)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도 소설 거리가 되려나?"라는 겸양으로 입을 뗀 방자가 전하는 이야기는 '러브 스토리'다. 나이 서른이 다 되도록 이집 저집 하인으로 팔려다니다가 남원 세도가 자제 몽룡의 몸종으로 흘러들어 온 방자.

몽룡을 따라 동네 한량 도련님들 풍류놀이에 따라나섰다가 청풍각의 외동딸이자 남원 최고의 미녀 춘향을 보고 한 눈에 반한다. 문제는 몽룡 도령도 춘향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 신분에 있어선 몽룡이 우위지만, 외모나 허우대, 마음씀씀이는 방자가 앞선 조건에서 두 남자는 춘향을 차지하기 위한 게임을 시작한다.

남자들은 자기들이 게임의 패를 쥐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게임을 리드하는 건 춘향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월매(김성령)에게 '은꼴편' 등 남자마음을 갖고 노는 법에 대해 '조기교육'을 받아 온 춘향은 방자와 몽룡을 상대로 어장관리에 들어간다.

영화는 몽룡이 여자 공략의 비기를 가진 마노인(오달수)의 도움으로 몽룡과 춘향을 놓고 겨루는 1부와 "목표가 뚜렷한" 변학도(송새벽)가 나타나 춘향을 괴롭히고, 몽룡이 어사출두로 춘향을 구하는 2부, 대책 없는 순정의 멜로와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3부로 나눌 수 있다.

이런 구조는 김대우 감독의 데뷔작 <음란서생>과 유사하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가 감독데뷔하기 전, 시나리오 작가 김대우로 명성을 떨치던 시절의 명작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구조와도 유사하다. 넓은 의미에서 <스캔들>을 김대우의 사극 멜로 3부작 안에 넣는다면, 그는 사극에 관한 편견을 깬 새로운 상상력을 성과 욕망의 현대적인 해석에서 얻는다고 볼 수 있다.

재기발랄한 성적 농담으로 슬쩍 기름을 치면서, 청순한 순정을 비웃는 척 하다가 결국은 지고지순한 사랑의 본질로 회귀하는 방식이 반복되고 있다. 다시 말해 김대우 감독은 확고한 로맨티스트다. 김대우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정사>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는 여동생의 약혼자와 사랑에 빠져버린 중년여성에게 둘이 함께 떠날 비행기표를 쥐어주는 작가다.

김대우 감독은 지고지순한,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반드시 가지고 싶은 '사랑의 힘'을 믿는다. 여기서 '믿는다'는 단어는 그리 순진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이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김대우 감독의 또 다른 특징을 설명해야 한다. 그는 '글쟁이'로서의 자아가 견고한 감독이다.

김대우 감독이 자신의 시나리오를 직접 연출한 <음란서생>은 아예 '문필가'가 주인공이고, <방자전>도 방자가 소설가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구조를 채택했다. 글쟁이의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분명 큰 장점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맛깔스러운 대사하며, 조연 하나하나에게도 이야기를 지워주는 세심함은 특출나다.

하지만 글쟁이의 자아는 끊임없이 '독자의 호불호'를 염려한다. <음란서생>에서 윤서는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되고자 '진맛'을 갈구하고, <방자전>의 방자는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있는 그대로 쓰지 말고 아름답게 바꿔달라"고 부탁한다.

정리하자면 김대우 감독은 독자 즉 대중이 지고지순한 사랑의 힘을 '믿는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재기발랄한 전반부의 '사랑의 게임'을 끝내 게임으로 끝내지 못하고 순정으로 끌고가려 애쓰는 것이다. 하지만 극장에 앉은 관객들은 마노인이 몽룡에게 질펀한 성적 비기를 전해 줄 때, 춘향이 앙큼하게 교태를 떨 때, 변학도가 특별한 성적 취향을 즐길 때 동요하고 반응한다. 오히려 춘향과 방자가 서로에 대한 순애보를 드러낼 때 시큰둥해 진다. 방자가 춘향전의 '사랑가'를 작사작곡하는 이야기보다 중반 이후 갑자기 사라진 마노인과 탐관오리의 누명(?)을 쓰고 끌려간 변학도가 더 오래 나오길 바란다.

이것은 <방자전>에서 방자, 춘향, 몽룡을 압도해버린 두 조연 오달수와 송새벽의 연기가 기가 막힌 탓도 있지만, 두 인물이 기존의 어떤 '춘향전'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였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순애보'로 치자면, <방자전>은 싱겁다. 추측컨대 여기서도 '글쟁이의 자아'가 작동했을 확률이 높다.

로맨스의 교과서 춘향전의 이야기를 비틀어 원작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글쟁이로서의 욕심이 보인다. 하지만 너무 센 상대를 골랐다. 상대는 다름 아닌 춘향전 아닌가.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사랑가 대목에서 아랫배가 짜르르하고, 뻔히 다 알면서도 암행어사 출두대목에선 속이 뻥 뚫리는, 정제되고 정제된 로맨스의 교과서와 맞장뜨기엔, 한양 건달의 순애보는 약하다.

앞으로 방자의 사랑이 어떻게 될 것인지의 궁금증보다, 월매 자매와 마노인이 재회했을지, 변학도는 풀려나와 "뚜렷한 목표"를 이뤘는지가 더욱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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