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가수 등용문으로 22년간 롱런[우리시대의 명반·명곡] 제1회 MBC 강변가요제 (1979년 지구레코드) 上라이브 음반 제작과 수상가수들 중심 독집 앨범이 성공의 핵심 요인

시원한 강바람과 바다가 그리운 계절이다. 젊음의 계절 여름이 되면 전국의 해변과 휴양지는 크고 작은 각종 록 페스티발이 다발적으로 열린다.

인천의 펜타포트 록 페스티발, 부산 국제 록 페스티발, 경기도의 지산 록 페스티발, 동두천 록 페스티발은 대표적인 대한민국의 여름 음악축제들이다.

과거에도 젊은 세대들을 열광시켰던 여름 음악축제는 많았다. 우선 1969년 전 세계에 충격파를 날렸던 미국의 '우드스탁'을 벤치마킹해 1971년 8월 17일에 포문을 열었던 청평페스티발이 있다.

총 6일 동안 록 밴드들과 포크 뮤지션들이 총출동했던 이 행사는 처음 4일간은 장대비로 운영 자체가 어려웠지만 비가 개인 마지막 이틀간은 그야말로 절정의 음악향연을 안겨주었다. 1977년 MBC 대학가요제의 성공에 자극받아 개최된 1978년 TBC 연포 해변 가요제도 7080세대들의 마음에 각인된 주옥 같은 명곡들을 탄생시킨 빼놓을 수 없는 음악축제다.

사실 연포에서 동양방송 주최로 개최된 대학생 해변 가요제는 1978년이 처음은 아니었다. 1973년 7월 '전국 대학생 보컬 경연대회'라는 것이 이미 개최되었다. '참가 팀은 각 대학별로 17개 팀에 이르렀고 1주일 동안 열전을 벌여 즐겁고 낭만이 가득 찬 분위기 속에서 마쳤다'고 당시 일간스포츠는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1979년 경기도 가평군 청평유원지에서 처음 개최되어 2001년에 폐지된 강변가요제 역시 한국 대중음악사에 각인된 대표 여름 음악축제였다. 제1회 대회의 공식명칭은 다. 강변가요제란 명칭은 2회부터 사용했다. 이전의 가요제들은 대부분 TV에서 주관했다면 이 행사는 라디오에서 주관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여름축제의 공통된 난제는 날씨였다. 1971년 시작된 청평페스티발도 비로 인해 행사 진행에 난항을 겪었듯 청평에서 출발해 가평, 춘천으로 북한강 줄기를 따라 장소를 옮겨 다녔던 강변가요제도 장마철인 8월의 음악축제였던지라 매년 대회 개최일을 잡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더위를 피해 태양의 계절을 만끽하려는 전국의 젊은이들이 북한강으로 대거 몰려들었을 정도로 강변가요제의 인기는 대단했다.

강변가요제가 배출한 노래와 가수들을 살펴보자. 우선 제1회 대회 때는 사촌 간으로 구성된 이색남성그룹 홍삼트리오가 '기도'로 금상을 받았고 경기공전생들로 구성된 청주사대의 5인조 보컬그룹 해오라기가 '숨박꼭질'로 은상을 수상했다.

이미 78년 해변가요제를 통해 존재감을 알렸던 건국대 캠퍼스밴드 건아들도 '가슴을 펴고'로 동상을 차지하며 여름노래의 파워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1회 대회의 출전 곡들은 여름 음악축제답게 '바다', '여름바다', '젊음' 등 계절감각과 젊은이들의 정서를 듬뿍 담은 노래들이 주종을 이뤘다.

1회 수상 곡 3곡은 모두 7080세대들에겐 추억의 향기가 가득하다. 특히 대상격인 금상 곡 '기도'는 남성특유의 부드럽고 격정적인 화음으로 지금도 불리어지고 있는 강변가요제 1호 히트곡이다. 홍삼트리오는 가요제 수상 이후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1983년 그룹 해체 이후 대중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이들의 성공신화는 강변가요제가 22년간 지속되는 롱런에 기름진 자양분이 되었다.

80년대와 90년 초반까지 한국 대중음악계를 이끌었던 가수들 중 상당수는 소위 '대학가요제' 출신이다. 당시 침체된 가요계의 돌파구 역할을 했던 각종 대학가요제의 인기는 방송마다 대학생 유치 작전까지 동원시킬 정도로 경쟁적이었다.

수많은 가요제가 양산되었던 당시, 강변가요제는 걸출한 가수들을 수도 없이 배출하며 신인가수 등용문 역할을 톡톡히 해낸 가장 성공적인 가요제였다. 당시 일종의 트렌드처럼 각광받았던 실황중계라는 이름의 라이브 음반 제작과 수상가수들을 중심으로 독집음반은 대학가요제 성공의 핵심 요인이었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