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드라마 <이웃집 웬수>천 길 물속보다 더 깊고 복잡한 한 길 사람 속내의 파노라마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노하우'가 쌓이지 않는 인생의 기술 중 하나가 바로 '관계 맺기'다. 여전히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렵고, 어른들을 모시는 일에 서툴고, 친구를 새로 사귀기는 커녕 있던 친구에게마저 소홀해지기 쉽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만남 속에서 필요 이상의 감정 노동에 진을 빼지만 정작 가장 외롭고 지칠 때 전화할 곳이 없어 망연자실해지곤 한다. 남녀노소에게 휴대폰이 생긴 이후 우리는 좀 더 외로움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체로 진화(?)한 느낌이다.

휴대폰의 하루 노동시간은 정확히 인간관계의 완성도에 비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휴대폰을 놓고 하루종일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전화하지 않았을 때의 허허로움을, 우리는 휴대폰이 존재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첨단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이전보다 훨씬 더 외로움에 취약한 신체가 되어버린 것 같다.

드라마 <이웃집 웬수>를 보며 '이혼한 전처와의 관계 맺는 법'까지 배워야 하는 시대가 오고야 말았음을 절감했다. 전근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복잡한' 고민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연인과 헤어져도 미니 홈피를 통해 매일 그 사람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고, 이혼을 해도 각종 첨단 네트워크를 통해 전처와 전남편의 소식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 하는 시대.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인연의 '방과 후 과제' 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각종 인연맺기의 잔기술과 노하우만 넘쳐날 뿐 죽을 때까지 인연을 소중하게 다루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는 철저히 '육감'에 의존해 관계맺기의 소중함과 어려움을 깨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웃집 웬수>는 천길 물속보다 더 깊고 복잡한 한길 사람 속내의 파노라마다. 단지 겉보기 등급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캐릭터의 '표리부동'을 통해 드러난다. 이 드라마를 보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남녀 간의 정 이외에도 수많은 인연의 그물을 통해 다양한 '정'을 필요로 함을 느낀다.

남편과 한바탕 싸우다가 아이가 혼자 외출하는 것을 미처 챙기지 못해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윤지영(유호정).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이력이 붙을 대로 붙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남편 김성재(손현주)와 이혼한 후 자신에게 진정 '결핍된 관계'의 본질을 깨닫는다.

부모의 이혼으로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버려졌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던 그녀는 새엄마의 친엄마 못지 않은 애정세례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혼자다'라는 생각 속에 살아왔다. 이혼한 전처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 못한 아버지(박근형)는 딸에 대한 사랑을 딸에 대한 가혹한 기대로 표출하고, 아버지의 기대에 늘 미치지 못하는 지영은 이혼까지 했다는 자책감을 버리지 못한다.

이혼이라는 거대한 '관계의 구멍'이 생기자마자 비로소 그녀 자신의 결핍과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결혼생활이 끝나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관계의 모세혈관을 느끼기 시작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벗어난다 해도 '결혼이 남긴 것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미운 정'은 우리를 얽어내는 제도 그 이상의 친밀성을 가리키는 한국식 표현일 것이다. 한국인들이 주로 '정'이라고 눙쳐버리는 그 오묘하고도 진저리나는 감정의 잔여물. 그까짓 정 때문에, 그 잘난 정 때문에, 우리는 '미워도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연민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게 된다.

옛날 옛적 그 설레는 마음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지영은 성재와 이혼 후에도 딸 은서를 핑계로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하고, 누가 봐도 그 두 사람은 '여전히 부부처럼' 뜨겁게 서로를 걱정하며 신경쓰고 있다. '지나친' 미운 정은 끝나지 않은 사랑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죽을 때까지 쿨할 수 없는 '이혼한 부부'의 관계를, 그 끊어낼 수 없는 '미운 정'의 실체를 확인한 김성재의 연인 강미진(김성령). 그녀는 모든 면에서 윤지영보다 뛰어난 '스펙'을 지녔지만, 이혼한 전처의 '미운 정 라운드'에서 턱없이 수세에 몰려 KO패할 지경이다.

"결혼한 것도 아닌데 헤어지는 데 무슨 절차가 이렇게 복잡해? 7년이나 함께 산 부부는 오죽 복잡하겠어?" '쿨하기' 대회에라도 나가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인 그녀조차도 전처의 집에서 흥분한 얼굴로 나오는 애인 김성재의 모습을 보고는 절대 쿨할 수가 없다. 그녀는 마침내 '쿨한 가면'을 벗고 김성재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전처와는 무슨 일을 해도 당당하다는 건가요?"

행복한 결혼생활의 유지를 방해하는 모든 방해요인을 '합리적으로' 제거하고 싶은 신세대 커플 또한 쿨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기훈(최원영)과 하영(한채아) 커플은 결혼에 대한 불신을 지우지 못하는 예비신부의 당당한 1인 시위 덕분에 결혼생활을 위협하는 모든 장애요인을 미연에 방지하기로 합의한다.

하영의 요구를 얌전하게 듣고 있던 기훈은 드디어 '쿨하지 못함'을 숨기지않고 드러내버린다. "결혼이 무슨 생명보험인줄 알아?" 기훈은 천방지축 낮도깨비 하영과 천년만년 잘 살고 싶지만 워낙 결혼의 실패 케이스들을 가까이 목격하며 살아오며 결혼에 대한 모든 환상이 다 깨져버린 그녀의 비위를 어쩔 수 없이 맞추어야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응원하는 커플은 채영실(김미숙)과 김우진(홍요섭) 커플이다. 수십년 전 맞선을 본 두 남녀는 서로에 대한 강렬한 호감을 뒤로 한 채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세 명의 동생을 키우느라 지금까지 솔로로 살아온 영실은 아직도 그를 잊지 못했다.

그녀는 마흔 아홉 살이 되도록 뜨거운 연애 한 번 못해봤지만 그녀의 턱없는 순수야말로 그녀의 진정한 매력이 되었다. 덕분에 그녀는 '처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어제처럼' 익숙하게 상황을 받아들일 내공이 생겼다. 굳이 결혼까지 하지 않아도 이미 마음 속으로는 결혼이나 이혼 못지 않은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으므로.

그녀가 '미운정'이 아닌 진짜 '고운 정'만으로도, 굳이 쥐어 짜낸 연민이 아닌 매일 사골처럼 깊게 우러나는 사랑으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내년이면 오십 세가 되는 그녀는 여전히 훈남이자 돌싱인 김우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녀의 귀여운 혼잣말은 나이 50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설레는 여린 감수성이야말로 우리가 잃지 말아야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임을 일깨운다.

"왜 볼때마다 가슴은 철렁하는거야. 미치겠네." 미처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혹시 정말로 사랑하게 될까봐, 정말 이 사람이 나의 인연일까봐 서둘러 끝내버린 슬픈 첫사랑이 이제야 시작되려 한다. 이렇듯 <이웃집 웬수>의 인물들은 저마다 인생에서 끝나지 않은 '인연의 숙제'를 천천히 풀어가며 사랑 후에 남겨진 과제들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사랑과 만나게 된다.

그들은 결혼이라는 피날레를 위해 달려가는 목적 의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피어나는 수많은 '미운정 고운정'을 평생동안 체험학습하며 죽는 날까지 미완성인 사랑을 배워갈 것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