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김태균 감독의 <맨발의 꿈>인류가 왜 스포츠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를 다시 일깨워

2010년 남아공 월드컵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월드컵에 '축제'라는 수식을 붙이는 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한 달 동안, 월드컵 덕에 잘 놀았다.

88올림픽도 아니고, 전 국민에게 '매스 게임' 훈련시키듯 응원 구호를 가르치려드는 CF가 심히 거슬리긴 했지만, 확실히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데 스포츠만한 게 없다.

한국이 16강 진출에 성공한 날, 길에서 낯모르는 사람들이 반갑게 건네는 인사에 답하면서, 스포츠의 위력을 새삼 느꼈다. 비슷한 감정을 김태균 감독의 <맨발의 꿈>을 보면서 또 한 번 느꼈다.

2005년 한 시사 프로그램은 이름도 낯 선 먼 나라, 동티모르에서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는 한국인 감독을 소개했다. 그는 '동티모르의 히딩크'라는 별명을 가진 김신환 감독. 인조 잔디구장은 커녕 먼지 풀풀 날리는 맨땅 경기장에서 닭똥 같은 땀을 뚝뚝 흘리며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김신환 감독의 모습에서 <늑대의 유혹> <크로싱>을 연출한 김태균 감독은 절박한 무언가를 느꼈다고 한다.

그 길로 김태균 감독은 동티모르의 김신환 감독에게 연락을 했고, 김신환 감독과 동티모르 청소년 축구팀이 이룬 작은 기적을 영화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김태균 감독은 이 이야기가 자신의 마음을 움직인 것처럼,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 확신한 것 같다. 확실히 <맨발의 꿈>은 좋은 스포츠 영화가 갖춰야 할 요소가 많다. 꿈을 잃어버린 남자와 꿈을 꿀 기회조차 없었던 아이들이 서로를 통해 기적을 본다. 기적의 씨앗은 축구공이고, 기적을 키우는 것은 뜨거운 땀방울이다.

한 때, 청소년 축구팀의 기대주였고 실업팀의 대들보였던 축구선수 김원광(박희순)의 현실은 팍팍하기만 하다.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 둔 뒤, 그나마 모아둔 돈은 연이은 사업 실패로 다 날려먹은 빈털터리 신세. 한 방을 노리고 뛰어들었던 사업은 죄다 사기꾼들의 농간이었고, 덕분에 빚만 산더미다.

"아직 아무도 선점하지 않은 동티모르에서 커피 사업을 하면 대박"이라는 말만 믿고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낯선 땅까지 흘러들었지만, 그 역시도 사기였다. 낙담하고 돌아가려던 원광은 먼지 풀풀 날리는 공터에서 틈만 나면 맨발로 낡은 공을 차는 동티모르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 바로 스포츠 용품을 할부로 파는 것이다. 비록 '짝퉁' 이지만, 매끈한 축구화를 보고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에게 원광은 "하루에 한 번, 1달러 씩, 두 달"이라는 조건으로 축구화를 판다.

축구화가 죽도록 갖고 싶었던 아이들은 그러마고 약속하지만, 매일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이곳 아이들에게 1달러는 너무 큰 돈이었다. 돈을 갚지 못한 아이들은, 그나마 아까워서 몇 번 신지도 못한 축구화를 원광에게 돌려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아이들의 그 눈물이 원광의 마음속에서 이미 말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축구에 대한 열정을 일깨운다. 원광은 아이들을 모아 청소년 축구팀을 결성한다. 사재를 탈탈 털어 유니폼을 맞춰 입히고, 굳은살이 박인 맨 발에 축구화를 신기고, 영양상태가 안 좋은 아이들에게 영양제까지 먹여가며 진짜 축구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물론 쉬울 리 없다. 공을 차며 달리는 재미만 알던 아이들은 '세트 플레이'와 '팀워크'을 강조하는 원광의 방식에 싫증을 낸다. 깊은 내전의 상처 때문에 앙숙이 된 주전 선수끼리 패스는 커녕 툭하면 주먹질이다. 게다가 동네 청년들은 '독한 한국 장사꾼'이 아이들을 홀리는 것 같아 못마땅해 한다.

내전이 끝나지 않은 탓에 밤이 되면 심심치 않게 총격전이 벌어지는 불안한 현실에서 축구는 철없고 배부른 취미생활로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이미 훌쩍 자라버린 아이들의 꿈을 옆에서 지켜본 원광은 차마 그 꿈을 버리라고 말할 수 없다. 원광은 이왕 맨땅에 헤딩할 바엔 제대로 받아보리라 마음먹는다.

자신의 축구팀을 동티모르 최초의 청소년 국가대표팀으로 만들고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 참가 신청서를 낸 것이다. 원광은 말한다. "이 아이들과 함께라면,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예상할 수 있듯, 그 끝엔 입이 떡 벌어질만한 기적이 기다리고 있다.

이 소박한 스포츠 영화가 관객의 감정 속으로 파고들어 골을 날리는 과정은 참, 한국 축구 같다. 종종 패스가 투박하고 거칠지만, 골문을 향해 죽기 살기로 내달리는 열정이 마음을 움직인다. 선수진도 흡사하다. 주인공 영광 역을 연기한 박희순은 공격부터 수비까지 도맡은 올라운드 플레이어 박지성을 연상시킨다.

경기장면에서 박지성의 얼굴만 보이면 마음이 든든한 것처럼, 박희순은 공수를 오가며 영화의 흐름이 느슨해지려는 순간 고삐를 조인다. 한국 영사관 직원 박인기 역의 고창석의 연기는 노련하고 묵묵한 꾀돌이 이영표를 보는 것 같다. 평소엔 조용히 박희순 곁을 지키다가 공을 받으면 현란한 개인기를 선보인다. 꼭 필요한 순간에만 쓰는 기술이라 전체적인 흐름에서 튀지 않지만, 그가 없었다면 영화의 골문 앞이 허전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맨발의 꿈>을 통해 '동티모르 1호 배우'라는 특별한 타이틀을 선물받은 아이들의 연기는 순박함이 장점이다. 아이들은 '우는 연기'를 하는 대신 그냥 울고, '웃은 연기'를 하는 대신 그냥 웃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동티모르를 떠나려다가 라모스의 체포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달려간 원광 앞에 아이들이 일렬로 서서 "미스터 김, 가지 마세요"를 울먹이는 장면은, 비슷한 영화에서 골백번도 더 본 클리셰 중의 클리셰지만, 그럼에도 코끝이 시큰해지는 건 아이들의 힘이다.

영화의 축구 경기 장면도 소박하지만 흥미진진하다. 박진감 넘친다고 말할 순 없지만, 나도 모르게 할리우드의 유명 스타가 출연하는 매끈한 스포츠 영화와 비교하자면 <맨발의 꿈>은 '동네 축구'처럼 느껴질 지도 모른다. 스포츠 영화의 '백미'인 경기 장면도 박진감 넘친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경기가 진행될수록, 애타게 아이들을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만큼은 어떤 블록버스터에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기술'로 이뤄낼 수 있는 골이 아니다. 아마도 김신환 감독과 김태균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보면서 땀이 일궈낸 기적을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가 스포츠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우리가 스포츠 영화를 통해 보고 싶은 것도 바로 이것이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