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정서에 맞는 스토리와 성적판타지를 자극하는 캐릭터 인기비결

KBS '구미호 여우누이뎐'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더니…." 아쉬움의 말을 남기고 울면서 떠나가던 구미호가 드디어 돌아왔다. 인간에게 약속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던 구미호.

예전 KBS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는 매번 인간, 즉 남편과의 약속에 울곤 했다. 구미호의 모습을 인간에게 들켰다가 자신을 본 것을 비밀로 해달라며 목숨을 살려주던 구미호.

하지만 그 인간을 남편으로 맞아 10년 간 비밀을 유지한 채 행복하게 살면 그뿐이다. 그러나 꼭 10년이 되는 전날 밤, 사건은 터지고 만다. 그렇게 배신당한 구미호가 여전히 우리에게 돌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미호, 30여 년간 TV 속에서 사랑 받는 이유

여름이면 단골손님처럼 TV를 지키는 요괴가 있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이면서 인간으로도 둔갑이 가능한 괴물. 바로 구미호다. 구미호는 1977년 KBS <전설의 고향>으로 안방극장을 찾았다. 당시 배우 한혜숙이 백발의 긴 가발과 하얀 소복을 입고 등장해 오싹한 공포를 선사했다.

이후 구미호는 공포물의 대표적인 소재가 되어 <전설의 고향> 속에서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었던 이야기 구조는 한(恨)과 복수다. 인간이 되기 위해 10년간 여우라는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야 하며, 그 기간 동안 사람의 간을 먹어야만 한다는 설정이다.

구미호는 이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배신을 경험하며 유유히 사라진다. "조금만 참았으면 인간이 될 수 있었는데…."라는 구미호의 마지막 절규는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다.

이렇듯 뻔한 구성의 구미호 이야기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흥미를 유발하는 건 어떤 이유일까. 먼저 한국적 정서를 살린 스토리 라인이다. 구미호의 이야기는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과 남편, 시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여인의 고운 심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는 인간애를 드러내며 시청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 속에서 한국적인 정서인 한이 구미호를 통해 우리를 대변한다는 점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모든 역경을 견뎌내며 인간이 되는 바로 하루 전날, 그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구미호의 운명은 가엽기까지 하다. 그 안타까운 이야기 구성이 구미호가 갖는 장점이다.

또한 구미호라는 캐릭터가 갖는 이중적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구미호는 인간 세상의 순종적 여인상과 동시에 그들을 유혹하는 섹슈얼리티한 내면을 보여준다. 특히 인간의 간을 빼먹기 위해 남자를 유혹하는 모습에선 성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구미호가 갖는 이중적 캐릭터는 남성들에게 어필하며 관심의 대상이 됐다.

KBS '전설의 고향 - 구미호'(2008년)
한혜숙, 장미희, 선우은숙, 박상아, 송윤아 등 당대 톱스타들만 거쳐 간 배역이 바로 구미호다. 이들은 수려한 외모로 남성들에게 묘한 성적판타지까지 제공하며 구미호에 대한 개념을 바꿔버렸다. <전설의 고향>에서 언젠가부터 구미호의 목욕신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1994년 영화 <구미호>는 배우 고소영을 내세워 에로티시즘적 시선으로 접근해 눈길을 끌었다. 영화 속 구미호는 밤마다 알몸이 되어 사랑하는 남자와 고통스럽게 뱉어낸 구슬을 주고받는다. 이 장면은 마치 섹스를 하는 듯한 판타지를 자아내며, 구미호에 대한 남성적 시각을 끌어냈다. 고소영을 통해 일명 '섹시한' 구미호를 탄생하게 한 셈이다.

KBS <구미호 여우누이뎐> 제작진은 "구미호는 민간설화의 주인공으로서 우리와 가까운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 매번 비슷한 이야기로 방영되지만 구미호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심리가 여전히 뜨겁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버전의 구미호들

구미호는 유독 한국인들에겐 친근한 대상이다. 중국과 일본에선 요괴로 비춰지며 표독스럽고 간사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중국 고전소설로 <삼국지연의>와 쌍벽을 이루는 명나라 때 소설 <봉신연의>에는 구미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달기(妲己)라는 구미호가 아리따운 인간 여자로 둔갑해 은나라의 주왕을 홀려 사악한 짓을 일삼은 것으로 묘사됐다.

KBS '전설의 고향 - 구미호'(2009년)
일본 에도시대의 동화책으로 알려진 <회본삼국요부전>에서도 달기가 등장한다. 역시 주나라의 마지막 왕인 유왕을 유혹해 나라를 망하게 했다가, 인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와 도바천황을 유혹하다가 음양사들에 의해 살생석이라는 바위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구미호가 해를 끼치는 요물이 아닌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역사적 사료 속에서 존재했던 구미호는 TV에 등장하면서 진화 과정을 거쳤다. <전설의 고향>은 인간이 되려는 구미호의 소망이 끝내 이뤄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그려왔다. 그러나 그 이후 2004년 KBS <구미호외전>은 현대극으로 꾸려지며 인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구미호족을 탄생시켰다.

<구미호외전> 속의 구미호는 엘리트로 살아오면서 인간들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날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로 설정됐다. 특히 <구미호외전>은 당시 액션 호러 멜로 드라마를 표방하며 새로운 형식으로 구미호를 그리고자 했다. 배우 김태희와 한예슬 등이 역시 구미호족으로 출연해 구미호 역할의 미인 계보를 잇는 데 한 몫 했다.

2008년 부활한 <전설의 고향>은 컴퓨터그래픽(CG)을 이용한 다이나믹한 영상을 만들어냈다. 특히 아홉 개의 꼬리가 실사처럼 움직이는 CG는 안방극장에 볼거리를 제공했다. 기술적으로 구미호의 캐릭터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과 구미호의 악연을 그리는 소재는 아쉬움을 낳기도 했다.

최근 구미호는 좀 더 현대적으로 바뀌었다. 공포물과 로맨틱 코미디라는 두 장르에서 서로 다른 구미호의 버전을 선보이게 된다. KBS <구미호 여우누이뎐>와 SBS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멜로와 가족애에 무게를 두고 만들어진 공포물이다. 구미호를 중심으로 16부작 드라마로 제작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야기는 10년이 되기 전날 약속을 깨뜨린 남편 때문에 인간이 되고자 했던 뜻을 이루지 못한 구미호(한은정 분)가 반인반수의 어린 딸을 낳아 복수를 시작한다는 내용. 진한 모성애와 더불어 인간적인 고뇌를 다루는 휴먼드라마를 만든다는 게 기획의도다.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에서의 구미호는 공포와는 거리가 멀다.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며 구미호와 인간의 사랑을 그린다. KBS <쾌걸춘향>과 SBS <마이걸>, <미남이시네요> 등을 집필한 홍미란, 홍정은 자매의 작품. 티격태격 싸우며 사랑을 키워가는 현실적인 구미호와 어리바리한 남자의 우연한 동거가 세련된 터치로 표현될 예정이다.

<구미호 여우누이뎐> 제작진은 "구미호는 국적 불명의 호러물이 아닌 우리 문화의 열매를 접할 수 있고 해학과 풍자, 교훈과 미담이 함께하는 한국적 공포 콘텐츠다"며 "앞으로 구미호의 이야기는 새로운 장르로 재탄생해 계속 안방극장을 찾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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