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강우석 감독의 <이끼>선택과 집중을 통해 원작 효과적으로 압축, 흥미진진 2시간 40분

충무로의 파워맨 강우석 감독의 신작 <이끼>가 베일을 벗었다. 처음부터 화젯거리가 많은 작품이었다. 영화 같은 컷 구성과 탄탄한 심리 스릴러로 호평받은 윤태호 작가의 원작만화 <이끼>는 여러 감독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결국 메가폰을 잡은 건, 예상 밖의 후보 강우석 감독이었다. 일각에선 코미디 혹은 액션에 능한 그가 치밀한 심리 스릴러를 소화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 원작의 방대한 이야기도 암초였다.

한정된 시간의 영화에 방대하고 꼼꼼한 이야기를 다 우겨넣을 수는 없는 법. 하지만 디테일이 중요한 심리극에서 가지치기를 잘못했다간 전체를 망치는 참사가 벌어진다. 그리고 주인공 천용덕 이장 역에 정재영이 캐스팅되자 우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이끼>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천용덕 이장의 극 중 나이는 적어도 70세.

30년의 시간대를 오가는 이야기지만, 주된 이야기는 70대 노인 천용덕이 끌고 간다. 정재영이 천용덕을 연기한다면, 특수 분장의 힘을 빌리거나 배우의 나이에 맞게 전체 이야기를 각색할 필요가 있었다. 원작의 팬들은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이토록 길게 우려를 나열한 까닭은, <이끼>가 이 같은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기 때문이다. 일단, 2시간40분이라는 살인적인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만큼 감독의 집중과 선택이 적확했다는 의미다.

물론 원작 팬으로선 잘라져 나간 가지들이 영 아쉽긴 하지만, 영화의 완결성으로 보자면 적절한 솎아내기다. 강 감독은 원작으로 뼈대를 세우고, 인물과 인물을 대치시킴으로써 퍼지는 이야기를 한 길로 몰아세운다. 빠르게 굽이치는 속도감,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내달리는 에너지. 영화 <이끼>는 파워맨 강우석 감독을 꼭 닮은 스릴러다.

인적이 뜸한 시골마을에서 선생님으로 불리던 유목형(허준호)이 갑자기 숨을 거둔다. 30년간 거의 왕래가 없었던 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아들 유해국(박해일)이 마을을 찾아오면서, 겉보기엔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마을에 묘한 긴장감이 싹튼다.

아버지의 집을 정리하던 해국은 밤마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고, 집을 이곳저곳 둘러보던 끝에 이상한 땅굴을 발견한다. 그 땅굴은 온 마을의 집을 하나로 연결하는 비상통로였던 것. 해국은 직감적으로 이 마을에 무언가 큰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눈치 채고, 아버지의 타살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해국이 마을 이곳저곳을 뒤적이고 다니면서, 조금씩 마을의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작은 동네 이장인 줄로만 알았던 천용덕(정재영)은 몇 백억 대의 부동산을 가진 갑부이자, 중앙 정치계까지 손이 닿는 거물. 해국의 눈엔 순박해 보이는 마을 주민들도 수상하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해국과 천용덕을 위시한 마을 사람들의 갈등이 점점 커지면서, 마을 주민들은 해국에게 알 수 없는 살기를 드러낸다. 목숨을 위협받은 해국은 비록 악연이긴 해도 인연이 있는 검사 박민욱(유준상)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박민욱은 마을의 비밀이 30여 년 전 지방의 한 기도원에서 벌어진 신도 몰살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밝혀낸다. 이로써 진실을 밝히려는 자들과 비밀을 감추려는 자 사이에 전면전이 시작된다.

윤태호 작가의 원작만화 <이끼>는 이야기꾼이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큼 맛있는 재료지만, 숨겨진 가시 때문에 요리하긴 쉽지 않은 작품이다. 숨겨진 가시는 시간이다. 어둡고 끈적한 인간의 욕망이 30년의 시간대를 들락거리며 서서히 한 편의 스릴러로 엮이는 구성이 원작 만화 <이끼>의 가치인 셈이다. 마치 한지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이 결국 백지 전체를 검게 얼룩지우는 과정과 같다. 상상하기엔 흥미롭지만, 마냥 지켜보고 있기엔 지루한 구석이 있다.

강우석 감독은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인물의 전사를 간단히 설명하고, 과감하게 시간을 압축해 버린다. 그리고 불안이 찰랑이는 마을에 해국을 툭 떨어뜨림으로써, 검은 물이 고여 있던 둑을 터뜨린다. <이끼>의 스릴은 일상적인 불안과 두려움부터 시작된다. 낮에 보면 공기 좋은 마을이지만 밤이 되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둡고 낯선 곳이다.

홀로 고립된 불안,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근원적 공포, 외지인에 대한 토박이의 은근한 경계 등 해국이 처음 겪은 불안은 우리도 한 번쯤 느껴봄 직한 것이다. 때문에 해국의 두려움과 불안은 관객에게 쉽게 전이된다. 인기척을 느낀 해국이 아버지의 집을 뒤지고 다닐 때, 공포 영화 식의 깜짝쇼는 없지만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 무서운 건, 관객에게 해국의 불안이 전이된 때문이다. 그 뒤 적절한 순간 해국의 불안이 현실로 나타나고, 백주 대낮의 시골마을은 생지옥으로 둔갑한다.

빠르게 흘러가는 이야기의 물길이 굽이치는 대목에서 감독이 둑으로 삼은 건 든든한 배우진이다. 만약 단 한 인물이라도 삐끗했다면, 영화의 긴장감과 에너지는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구원에 집착하며 '신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유목형은 인물 중 가장 축약이 심해 이야기를 많이 빼앗겼지만, 허준호의 초월한 눈빛 덕에 존재감을 지켰다.

해국 역의 박해일은 불안과 공포,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을 포기하지 않는 복합적인 소시민 역을 맞춘 듯이 해낸다. 불꽃놀이처럼 화려한 임팩트는 마을 주민 석만 역의 김상호, 성규 역의 김준배, 덕천 역의 유해진이다. 해국이 비밀의 둑을 터뜨리자 그들의 얼굴에서 사람 좋은 미소가 썰물처럼 씻겨 나가고, 살기가 차오르는 순간은 소름 끼치게 훌륭하다.

그 중 유해진의 단독 무대가 펼쳐지면, 객석에선 침 삼키는 소리마저 사라진다. 해국이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석만과 성규를 '스테이지 클리어'한 뒤 '대마왕' 천용덕과 마주 서는 장면에선 정재영의 에너지와 노련함이 느껴진다. 정재영의 70세 노인 분장은, 이물감이 사라진 지 오래다. 100년 먹은 구렁이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노인의 형형한 눈빛이 문득 소름 돋을 뿐이다.

정재영이 태산처럼 버티고 선 덕에, 쟁쟁한 배우들의 살 떨리는 연기가 한바탕 살풀이하듯 지나간 자리가 헛헛하지 않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줄줄이 흥행에서 실패한 전력이 있다. <이끼>의 에너지가 '만화 쪽박' 징크스를 깨는 첫 영화가 되길 기대한다.



박혜은 영화 칼럼니스트